문재인 대통령은 출범 초기였던 2017년 7월 여야 대표들과 오찬 자리에서 “낙하산·보은 인사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는 요구에 “그런 일은 없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2020년 이후 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9개 금융공공기관장 자리를 관피아(관료+마피아 합성어) 출신들이 싹쓸이한 것으로 나타났다.
24일 공공기관 경영 정보 공개 시스템 알리오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 당선 전인 2016년 9개 금융 공공기관 중 관료 출신은 2명(22%)에 불과했다. 한국은행 출신을 포함해도 3명이었다. 그런데 문 대통령 취임 후 6명(2017년), 8명(2018~2019년)으로 관료 출신 기관장 숫자가 급증했다. 급기야 작년부터는 금융 공공기관장 자리 100%를 관료 출신들이 꿰찼다. 2014년 세월호 사고 이후 줄어들었던 ‘관피아의 재림'이라는 말이 나온다.
◇친(親)정부 성향 관료 특징
낙하산으로 내려온 관료들은 정권과 거리가 가깝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지난달 취임한 정지원 손해보험협회장은 고시 출신으로 금융위원회 상임위원까지 역임했다. 이후 한국증권금융·한국거래소에 이어 손보협회까지 알짜배기 금융 유관 기관장 세 자리를 연속으로 차지해 업계에선 매우 이례적으로 평가받는다. 일각에선 현 정부에서 금융계 실세로 떠오른 ‘부금회(부산 출신 금융인 모임)’ 영향력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 회장은 부산 대동고 출신으로 부금회 핵심 멤버로 알려져 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과는 대학 동기(서울대 경제학과)다.
윤종원 IBK기업은행장은 문재인 정부에서 두 번째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았다. 10년간 은행 내부에서 행장이 배출된 전통을 깨고 대통령이 윤 행장을 선임했다. 기은 노조는 “문 대통령도 야당 대표 시절 ‘기업은행만큼은 외부 인사를 임명해선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했지만, 임명이 강행됐다.
방문규 수출입은행장은 예산통으로 기획재정부 2차관을 지낸 후 김경수 경남도지사 직속 경제혁신추진위원장을 지냈다. 2019년 10월 우리나라 무역 금융을 책임진 수출입은행장으로 예상을 뒤엎고 깜짝 발탁됐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금융감독위원회(현 금융위·금감원) 부위원장(차관급)을 지냈다. 작년 9월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출판기념회에서 이 전 대표의 ‘집권 20년론’을 거론하며 “가자! 20년!” 건배사를 외쳐 논란을 빚었다. 재정경제부(현 기재부) 국장 출신인 이정환 주택금융공사 사장은 19·20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당 부산 지역 후보로 출마한 대표적 친여 관료 출신이다.
◇전문성 떨어져도 낙하산으로 꽂아
전문성 부족에 대한 지적도 많다. 생명보험협회 2인자로 재직 중인 김제동 전무는 금융위에 7급 공채로 입사한 뒤 보험 관련 부서를 한 번도 거친 적이 없다가 작년 6월 생보협회 전무로 옮겨왔다. 작년 말 선임된 정희수 생보협회장은 직전 보험연수원장을 제외하곤 줄곧 야당에 몸담은 정치인 출신이다. 현재 손보협회 전무 자리에도 김대현 전 금융위 감사담당관이 거론되고 있는데 그 역시 보험 관련 공직 경험이 전혀 없다. 한 보험사 임원은 “과거엔 관 출신이더라도 적어도 보험 경력이 있었는데 최근 들어선 무경력자가 오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최근 흐름이 협회장은 1급 고위공무원, 전무는 과장직에서 내려오는 공식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김광수 은행연합회장·정지원 손보협회장·김주현 여신금융협회장 모두 금융위 1급 고위공무원 출신이다. 김제동 생보협회 전무·오광만 여신금융협회 전무는 각각 금융위·기획재정부 과장직에서 현 자리로 옮겨왔다. 손보협회 전무로 거론되는 김대현 전 금융위 감사당담관도 과장이 마지막 직급이다.
이명호 한국예탁결제원 사장은 지난해 옵티머스 펀드의 5100억원 규모 투자금 환매 중단 사고에서 “결제원이 운용사 투자 내역을 제대로 확인 안 했기 때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무인보관함 관리자한테 책임을 묻는 꼴”이라고 해명하며 논란거리를 만들었다. 이 사장도 금융위 구조개선정책관과 더불어민주당 수석전문위원(1급)을 거친 관피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