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정부 청사 금융위원회

경기도의 한 고교 교사 고모(60세)씨는 요즘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부산의 아파트를 전세 놓고 받은 보증금 3억원을 2019년 1월 팝펀딩이라는 대출중개회사(P2P) 상품에 투자했다가 날렸기 때문이다. 부동산이 아니라 설비 등을 대상으로 하는 동산(動産)담보대출 상품이었다. 고씨는 “금융위원장이 좋다고 칭찬한 금융 상품”이라는 증권사 직원의 말을 믿었는데 담보 가치 부풀리기 등이 드러나 작년 1월 투자금 1050억원 상환이 중단됐다. 그는 “아내와 싸우고 집을 나와 원룸에서 혼자 지낸다. 노년이 비참해질 것 같다”고 했다. 요양원에 거주하는 이모(91)씨도 팝펀딩에 투자했다가 노후 자금을 날릴 처지다. 그는 “요양원 보증금은 계속 오르는데 가진 돈은 사라졌다”며 “정부도 못 믿으면 누굴 믿어야 하느냐”고 했다.

정부가 금융시장을 휘젓는 ‘관치(官治)’가 금융 상품에 대한 정책과 금융권 낙하산 등에서 다시 고개를 쳐들면서 부작용이 커지고 있다. 동산담보대출의 경우 2018년 3월 문재인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비(非)부동산 담보 활성화 방안도 속도감 있게 추진하라”고 지시했고, 2개월 뒤 금융위원장이 “2022년까지 6조원 규모로 키우겠다”며 추진 전략을 내놨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2019년 말 팝펀딩 물류 창고를 찾아가기도 했고, ‘금융 혁신 사례'라고 추켜세웠다. 이러면서 6개 은행(국민·신한·하나·우리·산업·기업)의 동산담보대출 잔액은 2017년 말 1746억원에서 작년 6월 말 2조2521억원으로 13배 급증했다. 그런데 부실이 커졌다. 부실률이 3%를 넘어 전체 대출 부실률(0.8%)의 4배나 됐다.

기간산업 돕겠다더니… 40兆기금 조성해놓고 집행은 0.7%뿐

정부의 금융 관치는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6조원 넘게 원금 상환이 중단된 사모펀드 사태도 금융위원회가 투자자 자격 조건 등 문턱을 낮춘 것이 발단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현 정부의 금융 정책들은 수요·공급의 기본 시장 메커니즘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더 큰 부작용이나 사고가 터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픽=이철원, 양진경

◇기간산업안정 40조 기금, 집행은 0.7%

지난해 5월 국가 기간산업을 지원하겠다며 40조원 규모로 조성된 기간산업안정기금은 단 2차례, 총 2700억원(0.7%)만 집행됐다. 1호는 산업은행 관리하에 있었던 아시아나항공이었다. 산은이 기금의 조달·관리를 맡고 있어서 셀프 지원인 셈이다. 두 번째 사례도 국책은행인 수출입은행 관리하에 있던 제주항공이었다. 자금난이 심각한 기업이 많았지만, 실제로 돈을 받아간 곳이 드물었던 이유는 까다로운 지원 조건을 달아놨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운업의 경우 150여 해운사 중 ‘총차입금 5000억원과 근로자 수 300명 이상’ 지원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킨 경우는 10여 곳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코로나로 실적이 악화됐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해 헛물만 들이켰다.

◇6조 상환 중단 사모펀드 사태

2018년 이후 터지기 시작한 사모펀드 사태도 정부가 손을 대면서 벌어진 일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위원회는 2015년 ‘사모펀드 활성화 대책’을 발표하면서 각종 규제를 완화했다. 2014년 10곳에 불과했던 사모펀드 운용사가 2019년엔 217곳으로 20배 이상 늘었다. 사모펀드에 투자된 자금 역시 2014년 173조원에서 2019년 412조원으로 급증했다. 거품이 커지고 있었지만 금융위는 2018년 2차 사모펀드 규제 완화 방안까지 내놓았다. 결국 거품이 터졌다. 2011~2017년 한 건도 없었던 사모펀드 환매 연기 건수는 2018년 10건, 2019년엔 187건, 작년에도 164건(8월 말 기준)으로 급증했다. 규모는 라임펀드(1조4651억원)를 포함해 6조원이 넘었다.

◇혁신 금융이라던 P2P는 연체율 급증

정부가 혁신 금융으로 밀던 ‘온라인 대출 중개사(P2P)’의 부실도 심각한 수준이다. 연체율이 급증하고 있다. P2P 정보 업체 미드레이트에 따르면, 작년 1월 말 13.1%였던 P2P 연체율은 12월 말엔 22.9%로 집계됐다. 1년 새 2배 가까이 급증했다. 최근 정부가 P2P 관련법을 제정해 업체들을 제도권에 진입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240여 업체 중 신청한 곳은 5곳에 불과하다.

◇전망 빗나간 증권시장안정펀드

작년 3월 코로나 사태로 증시가 휘청일 때 “증시를 안정시키겠다”며 정부가 10조원 규모로 조성하려던 증권시장안정펀드는 증시가 살아나면서 헛발질이 됐다. 문 정부의 첫 관제 펀드였던 성장지원펀드 역시 3년간 9조8173억원을 조성했지만 실제 투자는 작년 4분기까지 3조3922억원(35%)에 그쳤다. 정부가 손을 댄 것마다 시장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하거나, 탁상공론에 불과해 시장의 외면을 받는 모습이 꼬리를 물고 있다. 지난해 7월 정부가 ‘K뉴딜’ 경기 부양책을 발표하면서 출시된 뉴딜펀드들도 성적이 저조하다. 펀드평가사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뉴딜펀드 9개의 최근 한 달 평균 수익률은 13%로 코스피(15%)를 밑돈다.

◇군장병적금 이자 1% 더 준다고?

2018년 문재인 대통령 지시로 전 은행권에서 출시된 장병내일준비적금은 기본금리 5%에 정부가 재정으로 1% 추가 이자 지급을 약속했다. 그러나 정부는 법 개정이 안 됐다는 이유로 2년째 추가 이자를 지급하지 않았다. 야당이 나서서 법 개정을 하겠다고 했지만, 정부·여당 모두 모르쇠로 일관해 결국 용두사미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