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저금리·저출산'이라는 짙은 안개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한국금융이 작년엔 코로나 사태라는 거대한 폭풍우까지 맞았다. 국내 금융사들은 디지털혁신·글로벌진출·ESG경영이라는 세 가지 핵심 키를 쥐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금융은 필요하다. 그러나 은행은 필요하지 않다.”

1994년 빌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의 이 말은 27년 뒤 우리나라에서 점점 현실이 돼가는 모습이다. 2015년 7281개였던 국내 은행 점포 수는 2020년 6406개로 5년 만에 875개(-12%) 줄었다. 작년 한 해에만 은행 점포가 303개나 문을 닫았다. 그러나 금융 산업에 네이버·카카오 등 빅테크 기업들까지 진출하면서 이 분야 경쟁은 오히려 더 치열해지고 있다.

최근 수년간 국내 금융 산업은 커다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놓였다. 저성장·저금리·저출산이라는 구조적인 변화로 시장이 정체된 상황에서 이자 이익 의존도가 높은 국내 은행들은 수익성 악화에 직면했다. 여기에 코로나 사태로 실물 경제가 침체되면서 저성장·저금리 추세의 장기화 가능성이 커졌다. 생존 문제에 직면한 국내 금융사들은 이제 ‘디지털 혁신’, ‘글로벌 진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으로 ‘넥스트 스텝(다음 단계)’ 돌파구를 준비 중이다.

◇디지털 산업혁명 생존 혁신

신한금융은 작년 6월 성공적인 디지털 전환을 위해 임직원들이 함께 4일 동안 디지로그(Digilog) 토론회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선 “기존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금융에 접근해야 한다. 준비 시간이 별로 없다”는 위기 의식이 공유됐다. 작년 10월 곧바로 회장 직속의 30여 명 규모 ‘룬샷 조직’이 출범됐다. 룬샷(Loon Shot)은 과감한 아이디어로 세상을 바꾼다는 뜻의 영어다. 국내 금융그룹 중 유일하게 디지털 플랫폼을 통한 영업이익을 발표하고 있는 신한금융은 작년 4분기(10~12월) 전년 대비 38% 넘게 성장한 1조2240억원 영업이익을 거뒀다. 조용병 신한금융 회장은 올 신년사에서 “신한의 운명도 디지털 전환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금융은 올해 경영 목표를 ‘디지털 퍼스트, 디지털 이니셔티브(Digital First, Digital Initiative)’로 정했다.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은 새해 첫 경영 전략 회의에서 “아마존, 구글처럼 매일을 첫날 같은 자세로 혁신해 시장을 놀라게 하자”고 강조했다. 작년 5월엔 디지털혁신위원회를 꾸렸고, 작년 10월엔 본사 건너편 ‘우리금융남산타워' 사옥명을 ‘우리금융디지털타워’로 바꿨다. 손 회장은 매일 오후 이곳으로 출근해 디지털 혁신 업무를 챙기고 있다.

NH농협금융은 ‘내 손 안의 금융 비서’를 구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은행·카드·보험·증권 등 기존 금융사 위주의 서비스를 과감히 허물고 전 계열사 서비스를 ‘원스톱’으로 이용할 수 있는 통합 플랫폼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농협은행의 모바일 앱 ‘올원뱅크’를 대표 관문으로 만들고, 자산관리·보험·투자 등 서비스를 모두 장착하기로 했다. 올원뱅크를 통해 NH투자증권의 주식 투자·분석 서비스나 농협생명의 보험 설계까지 받게 하는 식이다.

◇글로벌 진출도 디지털과 접목

‘글로벌'은 국내 금융사들이 ‘디지털'과 함께 추구하는 양대 사업 축 중 하나다. 그런데 코로나 발생으로 물리적 해외 진출에 애로를 겪으며 이 분야에서도 디지털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신흥 시장에서 스마트폰 보급률이 증가하고 현지 금융 당국이 디지털 금융 활성화 정책을 시행하는 것도 글로벌 디지털화의 촉매 역할을 한다.

하나은행 중국법인은 작년 11월 전자상거래기업인 알리바바의 앤트파이낸셜과 함께 비대면 개인 대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출시 4개월여 만에 6300억원어치 개인 대출 실적을 올렸다. 인도네시아법인은 디지털은행 ‘라인뱅크(Line Bank)’ 출범을 준비 중이다. 작년 한 해 동안 하나은행은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 각각 845억원, 475억원의 순이익을 거뒀다.

KB금융은 작년 4월 캄보디아의 소액 대출 금융기관인 ‘프라삭 마이크로파이낸스’를, 8월엔 인도네시아 중형 은행인 부코핀 은행을 잇달아 인수했다. KB금융이 인수한 두 회사 모두 현지에서 디지털 역량을 가진 금융사로 평가받는다. KB금융은 이 두 회사를 발판 삼아서 동남아시아 시장 진출을 가속화한다는 방침이다.

◇실적으로 연결되는 사회공헌

금융지주사들은 올해 핵심 경영 기조로 ESG를 내세웠고, 일찌감치 작년부터 전담 조직을 신설하고 경영에 접목시키고 있다.

신한금융은 실제로 카드 결제액의 일정 비율(0.1%)을 모아 서울그린트러스트에 기부하는 신용카드 등 친환경 전용 상품을 내놓고 있다. 정부로부터 자원절약형·자연친화적 건축물로 인증받은 그린빌딩에 리츠(REITs·부동산투자회사) 형식으로 투자하기도 한다. 리츠는 투자자가 부동산 투자 회사 주주로 참여해 배당을 받는 투자 방식을 말한다. 신한금융은 이 같은 녹색 산업에 2017년부터 2조5418억원을 투자하고 있다.

KB금융은 2019년 ESG경영 중장기 계획인 ‘KB그린웨이(Green Way) 2030′을 수립했다. 2030년까지 KB금융그룹의 탄소배출량을 25% 감축하면서, 현재 약 20조원 규모의 ‘ESG 상품·투자·대출'을 50조원까지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사회공헌 활동이라는 일회성 활동에 그치지 않고, 실적으로 연결시키겠다는 것이다.

서정호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은행들은 곧 ‘파괴적 변화’를 직면하게 되겠지만 은행의 모든 핵심 역량이 다른 경쟁자들에 의해 일시에 대체되긴 어려울 것”이라며 “은행이 축적해 온 ‘신뢰’는 여전히 강점이기 때문에 아직 새로운 경쟁자들의 진입 문턱이 남아있을 때 은행들은 충분히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