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생 10명 중 7명은 “은행에서 파는 금융 상품은 전부 원금이 보장된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은행도 펀드 등 원금 손실이 있을 수 있는 금융 투자 상품을 판매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정기 예금과 적금의 차이를 “모른다”는 학생이 65%였다.
‘금리 인하 시기에 대출을 받을 때는 고정 금리와 변동 금리 중에 어떤 것이 유리한가’라는 질문에는 60%의 학생이 ‘고정 금리가 유리하다'는 틀린 대답을 했다. 금리가 떨어진 만큼 반영되는 변동 금리가 유리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고3의 경우라면 당장 내년에 대학에 진학해 학자금 대출을 받게 될 수도 있는데 금리에 대한 기초 상식조차 없었다.
본지가 지난달 9~13일 한국금융교육학회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를 통해 중고생 149명, 중·고교 교사 10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다. ‘학교에서 금융 교육을 받아봤다’고 응답한 학생은 10명 중 2명(19%)에 불과했다.
동학 개미, 서학 개미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2030 세대부터 고령층까지 금융 투자가 늘면서 지난해 우리나라 주식 투자자 수는 900만명을 넘어섰지만, 우리 아이들은 교실에서 금융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금융을 정규 과목으로 정해 가르치고 있는 금융 선진국에 크게 뒤지는 상황이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6070세대에 대한 금융 교육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위험 투자로 손실을 보거나 금융 사기 등으로 피해를 입어 노후 자금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나 지자체가 기본적인 금융 강의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금융 교육 현실은 ‘금융 문맹'을 방치한다는 지적을 받는 수준이다. 오는 25일부터 시행되는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금융 교육 관련 조항이 반영됐지만 “금융위원회가 관련 시책을 수립·시행하라”는 선언적인 수준에 그친다. 한진수 경인교대사회교육과 교수는 “돈 관리법을 모르고 사회 생활을 하는 것은 수영도 못하면서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한국, 금융 교과서 채택 0곳… 미국, 금융위기 후 정규교육 강화
경기 파주시 A중학 이모 교사는 지난 1월 은행 지점과 학교를 연결시켜 학생들에게 금융 교육을 해주는 금융감독원의 ‘1사1교’ 프로그램을 신청했다가 포기했다. 학부모들의 반발이 컸다. “영어나 수학 등 시험에 도움 될 수업을 해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무관한 금융 교육은 왜 하느냐”고 항의를 받았다. 이 교사는 “앞으로 애들이 사회생활 하며 금융을 꼭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서 추진한 건데 이렇게 반발이 클 줄 몰랐다”고 말했다.
‘1사1교’는 금감원이 2015년부터 은행, 증권사 등의 지점들과 전국 1만1000여개 초·중·고교를 연결시켜 금융 교육을 돕도록 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7700개 학교와 협약을 맺었지만 수능을 치른 고3들에게 일회성으로 교육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재완 서울 대진고 교사는 “입시가 우선이라 학부모나 학생들이 정규 교육 시간에 금융 교육을 하는 걸 꺼린다”고 말했다. 한 은행 임원은 “2~3년 전부터 서울 강남 3구와 경기도 분당 등 교육열이 높은 지역에서는 단 한 건도 신청이 들어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작년엔 코로나까지 겹치며 1사1교 수강생 수가 전년보다 40만명 넘게 줄면서 13만4000명에 그쳤다.
◇수능 경제 과목 선택 2.3%에 그쳐
입시 위주 교육에서 경제나 금융 교육은 뒷전일 수밖에 없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012년 금감원이 초·중·고교용 금융 교과서를 만들어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정식 교재로 승인까지 받았지만 아직까지 이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는 한 곳도 없다.
의무교육 과정인 초·중등 교육에는 금융 과목의 비중(교육 시간 기준)은 0.1%도 안 되는 것으로 금융교육학회는 추산했다. 금융위원회가 2019년 말 초·중·고교 교사 11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금융 교육 실태조사에 따르면, 금융 교육 시간은 연평균 9시간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금융만 가르친 별도의 과목은 없었고, 사회·실과 등 다른 과목에서 이자 등 기초 개념을 수박 겉 핥기식으로 끼워넣은 것이 전부였다.
고등학교에서도 금융 교육은 설 자리가 없다. 고1 ‘통합사회’ 교과서 300여쪽 중 8쪽 정도만 자산관리, 생애 재무설계 등 금융에 할애돼 있다. 1년 중 2~3시간이면 끝나는 분량이다. 고2가 되면 경제 과목을 선택하지 않는 한 금융을 배울 기회는 아예 없다.
지난해 실시된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사회탐구 영역 9개의 선택 과목(2개) 중 경제를 선택한 학생은 2.3%에 그쳤다. 수능 사회탐구 영역 응시생 21만 8000여명 중 5000명에 불과했다.
작년 초 금융투자협회는 고교 금융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금융 교육이 홀대받는 상황을 바꾸려는 시도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도입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참여한 고교는 2곳뿐이다.
금융 교육을 하려면 기존 교과목에 배정된 시간을 줄여야 하는데 학부모와 교사들이 외면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로 등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금융 교육을 할 시간이 없다는 이유도 컸다. 금투협 프로그램을 도입한 학교 중 한 곳인 서울 여의도고는 모든 특별활동 시간을 폐지하는 방식으로 간신히 끼워넣었다.
◇학생 94% “금융 교육이 필요하다”
본지가 금융교육학회·한국교총과 함께 지난달 중·고생 149명, 중·고교 교사 10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금융 교육이 부실한 이유로 교사들은 ‘입시 위주 교육 체계’(72%)를 가장 많이 꼽았다. 충남의 한 고교 교사는 “1년에 딱 1시간만 금융 교육을 하는데 은행 거래 등 아주 기초적인 내용에 그친다”며 “그마저도 생활기록부에 반영하기 위한 용도”라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금융 교육 교사 양성 체계도 갖춰지기 힘들다. 금융위 금융 교육 실태조사에 따르면 학교 교사 중 71%가 “금융 교육 관련 연수 경험이 없다”고 답했다.
반면 학생들은 금융 교육의 필요성에 깊게 공감했다. 본지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 학생의 94%가 ‘금융 교육이 필요하다’고 답했고, ‘금융 교육이 향후 금융 생활에 도움 될 것이다’라는 응답도 97%에 달했다. 학생들은 학교(20%)보다는 주로 부모님(56%)과 유튜브(39%)를 통해 금융 지식을 얻는다고 답했다.
설문에 응한 학생들은 “어른들도 장시간에 걸쳐 금융 지식을 얻는데 학생들이 1시간 만에 펀드나 예·적금 개념을 바로 알 수는 없다” “경제를 초·중·고 필수 과목으로 정해야 한다” 등의 의견을 냈다.
천규승 금융교육학회장은 “어릴 때부터 돈에 대해 가르치는 현장성 있는 금융 교육이 중요하다”며 “금융 교육 경쟁력은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