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암호화폐거래소인 ‘빗썸’의 실소유주 이정훈(45) 전 빗썸홀딩스·빗썸코리아 이사회 의장이 지중해 국가 사이프러스(키프로스) 국적을 취득하려 한 정황이 드러났다. 게임 아이템 거래 사이트 ‘아이템매니아’의 창업주로 잘 알려진 이 전 의장은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경가법)상 사기 혐의로 검찰에 송치된 상태. 빗썸 매각 추진 과정에서 암호화폐인 BXA코인을 상장한다며 코인을 선(先)판매했으나 실제로는 상장하지 않아 피해를 입혔다는 것의 그의 주된 혐의 내용이다.
사건의 발단이 된 BXA코인 피해자들의 검찰 고소장을 보면 이 전 의장에 대한 사기 혐의 외에 재산국외도피 내용이 나온다. 주간조선이 확인한 검찰 고소장에서 피해자들은 “이 전 의장이 국내로 반입해야 할 재산을 해외로 빼돌린 정황이 있다”고 주장했다. “피고발인 이정훈의 지인들로부터 그가 이미 베트남 국적을 취득하고, 국내로부터 약 500억원의 자금을 베트남으로 은닉하여 부동산 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재산국외도피 혐의는 경찰이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가 베트남이 아닌 사이프러스 국적을 취득하려 했던 정황은 주간조선 취재 결과 드러났다. 재산국외도피 의혹에 단서가 될 수 있는 자료는 그가 사이프러스 국적 취득을 신청했다는 내용이 담긴 현지 신문 기사. 2018년 11월 28일 발행된 사이프러스 현지 신문사 ‘알리시아 뉴스(Alithia news)’에는 “이정훈씨가 내무부 장관에게 귀화를 신청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신문은 사이프러스 국적 취득을 신청하는 이들을 정기적으로 지면에 게재한다. 이 기사에 나오는 ‘이정훈’의 생년월일은 1976년 7월 15일생으로 확인됐다. 이 전 의장 역시 1976년 7월 15일생이다. 이 전 의장이 신청한 사이프러스 국적 취득은 아직 계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 의장은 지난해 홍콩과 베트남, 싱가포르 등 주로 해외에 머물러왔는데 당시에도 그가 “사이프러스 국적을 취득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대해 빗썸 측은 “이 전 의장의 국적은 한국”이라는 답변만 내놨다.
이 전 의장은 왜 하필 사이프러스 국적을 신청했을까. 유럽연합(EU) 회원국인 사이프러스는 현지에서 215만유로(약 30억원) 이상의 부동산만 취득하면 국적 취득을 허용하는 나라다. 지난해 11월 에릭 슈미트 전 구글 회장이 이런 방식으로 사이프러스의 시민권을 취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이프러스 시민권이 있으면 유럽연합 27개 회원국에서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고, 유럽 내 은행 계좌에 돈을 예치할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사이프러스 시민권은 ‘황금 여권’으로 불린다. 세계 부호들의 ‘조세 피난처’ ‘비자금 금고’라는 별칭도 따라붙는다. 이 전 의장이 무슨 이유로 사이프러스 국적을 신청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사이프러스 국적 취득으로 얻을 수 있는 이런 혜택들이 배경이 됐을 가능성은 있다.
이른바 ‘빗썸 사태’는 피해를 입었다는 BXA 투자자 55명이 이 전 의장과 김병건(58) BK메디컬그룹 회장을 비롯해 빗썸의 전·현직 임원 9명을 2019년 검찰에 고소하면서 시작됐다. 김병건 회장은 2018년 10월 인수가 3억5000만달러에 빗썸 지주사인 빗썸홀딩스를 인수한다고 발표하면서 BXA토큰을 ‘거래소코인’으로 상장시킨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은 검찰에 고소한 피해자들의 피해금액 78억원을 포함해 BXA토큰 발행으로만 300억원의 판매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김 회장의 빗썸 인수는 무산됐고, 김 회장은 2019년 10월 이 전 의장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계약금 1억달러를 제외한 잔금을 납입하지 못해 빗썸 인수를 정상적으로 진행하지 못하자 이 전 의장에게 계약금을 반환하라는 민사소송을 낸 것이다. 이 소송 과정에서 이 전 의장이 BXA를 빗썸거래소에 상장해 김 회장의 인수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약정을 맺은 사실도 드러났다. 결국 BXA토큰 발행이 김 회장의 인수 자금 마련을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 셈이다.
고소장에서 피해자들은 “피고소인들은 2018년 3월경부터 2019년 11월 30일까지 BXA가 빗썸을 포함한 12개 거래소 연합에서 기축통화와 같은 역할을 하는 거래소코인(소위 ‘빗썸코인’)이 될 것이라고 믿게끔 피해자들을 기망하여 BXA를 판매하고 대금을 편취했다”며 “그러나 피고소인들은 처음부터 BXA를 빗썸코인으로 활용할 의지나 능력이 없이 거래소 연합체를 구성할 수도, BXA를 거래소코인으로 사용할 수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판매하여 이에 속은 고소인들로부터 최소 약 78억원 상당의 재산상 이익을 취득했다”고 주장했다.
암호화폐거래소인 빗썸이 만든 암호화폐(거래소코인)를 발행해 상장한다고 알려 투자를 받았지만, 이 거래소코인이 제대로 상장되지 않아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통상 거래소에서 발행한 거래소코인은 투자 안정성 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발행 초기 BXA토큰은 개당 150~300원에 300억원어치가 팔렸지만, 상장이 무산된 이후에는 개당 2원까지 가격이 폭락했다.
이 전 의장과 함께 고소된 BK메디컬그룹 설립자인 김병건 회장은 서울대 의대 졸업 이후 성형외과 의사로 근무하던 1990년대 후반 원격진료시스템 개발 업체인 ‘비트컴퓨터’에 투자해 약 20억원의 수익을 올리며 ‘슈퍼개미’로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이후 각종 사업과 투자를 통해 수천억원대 자산을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 의장은 20대에 창업에 성공한 벤처사업가 출신이다. 전북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2002년 20대 나이에 ‘아이템매니아’를 창업했다. 그는 2008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안전한 아이템 거래 사이트’를 만드는 창업을 결심했다. 2002년 7월 월세 30만원짜리 원룸에 컴퓨터 5대를 갖춰 놓고 사이트를 오픈했다”고 밝혔다. 그는 2006년 미국계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가 아이템매니아 지분 100%를 인수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인수금액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골드만삭스는 5000만달러 이상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아이템매니아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 그는 주로 막후에서 경영과 투자를 이어가다 암호화폐 업계에 뛰어들었다. 그가 암호화폐 업계와 인연을 맺은 과정과 관련해서는 2015년 ‘엑스코인’이라는 작은 암호화폐 기업에 투자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는데, 이 엑스코인이 현재 빗썸의 전신이다. 이 의장의 현재 자산 규모는 수조원대로 알려져 있다.
‘빗썸 사태’를 수사해온 서울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지난 4월 24일 이 전 의장을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사기 혐의로 검찰에 송치하면서 김병건 회장을 포함한 다른 8명의 혐의에 대해선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경찰은 지난해 9월 빗썸을 두 차례 압수수색했고 그동안 이 의장 등을 소환조사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