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DB

Buy(매수)만 있고 Sell(매도)은 없다. 이런 비판을 들어왔던 증권사 기업 분석 리포트가 달라지고 있다. 해당 기업의 목표 주가를 떨어뜨리고 소액 주주들의 원성을 살 수 있는데도 과감하게 ‘팔라’고 외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국내 증권사들이 매도 보고서를 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국내 10대 증권사의 매도 의견 비율은 0.3%에 불과했다. 대부분 ‘사라’는 말만 한다는 얘기다. 반면 메릴린치, CLSA 등 외국계 증권사들의 국내 기업 매도 의견 비율은 20%가 넘었다.

노골적인 매도 의견은 내지 않더라도 목표 주가를 현재 주가보다 낮춰서 사실상 매도 의견을 담은 리포트도 속속 나오고 있다. 이런 매도 보고서의 등장이 현재 주가가 고평가돼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란 해석도 나온다. 증권 업계 관계자는 “증시 호황기에 기대감이 지나치게 선반영되면서 실제 가치 대비 주가가 급등한 종목이 많다 보니 이례적으로 매도 의견이 쏟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주가보다 낮은 목표 주가 제시

올해 1분기(1~3월) 실적 발표가 마무리된 가운데,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의 시선은 제각각이다. 호실적을 올렸다고 해서 무조건 칭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반영됐으니 주가는 더 이상 싸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NH투자증권 조미진 연구원은 지난 17일 ‘더 이상 싸지 않다’는 노골적인 제목의 보고서를 내고, 롯데제과 목표 주가를 14만원으로 제시했다. 사업 정상화에 대한 기대가 주가에 충분히 반영됐다는 이유다. 18일 롯데제과 종가(15만1000원)보다 더 낮은 가격이다. DB금융투자는 최근 한화생명에 대해 매도(underperform) 보고서를 냈다. 이병건 DB금융투자 연구원은 “현재 4000원 수준인 한화생명 주가는 기준금리를 네 차례 정도 인상할 가능성을 선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KTB투자증권 이한준 연구원도 “컨테이너 운임 상승에 따른 수혜가 이미 반영됐다”면서 해운업체 HMM의 목표 주가를 3만8000원으로 낮춰 잡았다. 18일 HMM 종가는 4만2850원이다.

앞서 지난 17일 KB증권은 메리츠화재와 메리츠증권에 대해 매도 의견을 냈다. 회사 측의 갑작스러운 배당커트(배당 축소) 발표로 주주 환원책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것이 이유다.

메리츠그룹 관계자는 “배당은 소득세(15.4%)를 내야 하지만 자사주를 매입하고 소각하면 그만큼 주가 가치는 올라가면서 세금을 내지 않아 장기 주주에겐 오히려 이득”이라며 “선진국에선 이런 결정이 오히려 상식”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메리츠금융지주 등 메리츠그룹 3총사의 주가는 매도 보고서 여파로 지난 17일 14~17% 내렸다.

Buy (매수)

◊“주가 고평가됐다는 신호탄” 해석도

대형 증권사 소속 애널리스트가 발표하는 리포트는 대부분 우량 회사다. 알짜 기업을 선별해서 고객에게 추천하는 것이기에 뒤늦게 ‘Sell(매도)’ 리포트를 내는 일은 흔치 않다. 해당 기업과의 관계나 주주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매도 리포트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매도 리포트를 내기보다는 해당 기업을 분석 대상에서 조용히 드롭(drop, 제외)하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증권가에선 “보고서를 내지 않으면 매도 의견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도 있다.

이렇듯 투자 의견과 관련해선 가급적 몸을 사리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런 관행을 깨고 매도·중립을 외치는 소신 발언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개인 투자자들의 영향력이 부쩍 커진 상황에서 매수 일변도인 증권사 리포트에 대한 불만이 커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도 나온다. 개인 투자자들은 “주식은 매수보다 매도 타이밍이 더 중요한데, 증권사 리포트는 항상 사라는 말만 하고 언제 팔아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고 비판해 왔다.

심영철 웰시안닷컴 대표는 “주가 하락에 베팅하는 공매도도 1년여 만에 재개됐고 시장도 경기 회복 기대감에 많이 올라서 부정적인 의견을 가질 수 있는 시기”라며 “종목별로도 오버슈팅(급상승)한 종목이 많기 때문에 매도 리포트가 나올 때이긴 하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