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가상 화폐 거래소들의 운명이 NH농협은행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는 24일로 예정된 가상 화폐 거래소 등록 시한을 앞두고 금융권과 가상 화폐 업계의 시선은 NH농협은행에 쏠려 있다. 농협은행은 국내 4대 가상 화폐 거래소 중 2·3위인 빗썸과 코인원의 주거래 은행으로, 실명 계좌 발급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만일 농협은행이 실명계좌 발급을 거부할 경우 두 거래소는 문을 닫아야 한다. 특정금융정보법에 따라 가상 화폐 거래소들은 9월 24일까지 은행 실명계좌를 확보하고 정보보호 관리체계(ISMS) 인증을 받아 금융 당국에 신고해야 한다. 지금까지 국내 63개 거래소 중 이런 절차를 마치고 금융 당국에 등록을 신청한 곳은 업계 1위인 업비트 한 곳뿐이다. 나머지 62개 거래소는 실명계좌를 확보하지 못했다.

다른 은행들은 선뜻 실명계좌 발급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농협은행의 결정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농협은행이 62개 거래소의 운명을 결정하는 총대를 멘 셈이다.

/자료=금융위원회

◇트레블룰이 뭐길래

1일 금융권에 따르면, 농협은행은 지난달 26~27일 이틀간 빗썸과 코인원에 실명계좌 발급을 위한 실사를 진행했다. 데드라인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국내 2·3위 거래소가 아직 실명계좌를 발급받지 못한 것은 농협은행이 금융 당국보다 더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대고 있기 때문으로 전해졌다.

국제 규정상 가상 자산 사업자들은 거래소 간 자산을 주고받을 때 보내는 사람의 이름과 받는 사람의 고객 정보 등도 파악해 같이 보내도록 한 ‘트레블룰’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금융위원회는 내년 3월까지 이 시스템을 구축하라는 입장이지만, 농협은행은 이를 9월 24일까지 도입하라고 요구하면서 거래소들과 마찰을 빚고 있다.

트레블룰은 선례가 없기 때문에 거래소들이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빗썸⋅코인원⋅코빗은 최근 트레블룰 준수를 위한 합작법인을 설립했다. 이 법인이 금융 당국, 은행 등과 협의해가면서 트레블룰 시스템을 구축해간다는 방침이다. 케이뱅크에서 실명계좌 발급에 성공한 업비트는 내년 3월까지 트레블룰을 구축하기로 했다.

◇거래소 명줄 쥔 금융위 출신 농협은행 부행장

농협은행은 명확한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빗썸과 코인원에 6개월 앞당겨 트레블룰을 도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트래블룰 없이 거래소에 실명계좌를 발급해줬다가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농협은행이 떠안아야 한다는 우려가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농협은행이 금융위 권고에도 불구하고 트레블룰 적용 시한을 9월로 못 박고 있는 배경엔 준법감시인인 A부행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작년 2월 농협은행에 합류한 A 부행장은 행정고시 37회로 총리실에서 근무하다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금융위에서 6년간 근무한 뒤 김앤장 변호사로 일했고, 한국거래소 분쟁조정심의위원회 위원, 금융발전심의회 위원 등을 거친 관료 출신 금융 전문가다.

은행권은 부담스럽다는 입장이다. 실명계좌 발급을 거부해 거래소들이 문을 닫을 경우 코인 투자자들의 온갖 비난을 은행이 뒤집어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업비트 실명계좌를 발급해 준 케이뱅크보다 농협은행의 결정이 사실상 은행권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상 화폐 거래소에 대한 정책 결정권을 갖고 있는 금융위가 ‘뒷짐’만 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승범 신임 금융위원장은 거래소 줄폐업 우려에 대해 “더는 피하거나 미룰 수 없다”며 신고 기한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9월 25일 이후 문을 닫아야 하는 거래소 중 일부는 영업을 계속하기 위해 소송 등 총력전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은 “정부가 은행을 활용해 시장을 정리하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관치(官治)’를 놓지 않고 있다”며 “은행이 법률상 권한에도 불구하고 당국의 눈치를 보게 되다 보니 신고 마감 시한을 코앞에 두고 혼란이 극대화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