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A씨는 올여름에 시세 16억원쯤 하는 서울 강남의 아파트를 사려다 포기했다. 15억원 넘는 아파트에 대해서는 은행 대출을 한 푼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부동산에서 “대출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부동산이 소개해준 방법은 저축은행과 상호금융권이 취급하는 개인사업자 대출이었다. 주택을 담보로 개인사업자 대출을 받으면 시세의 90% 이상도 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 가계 대출과 다른 점은 사업체가 필요하다는 것이지만, 개인사업자 대출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담사는 페이퍼컴퍼니를 세우는 간단한 방법까지 알려줬다. 신분증만 있으면 국세청 홈페이지에서 신청할 수 있고, 3일 내에 사업자등록증을 받을 수 있다. 한 상담사는 “국세청 조사를 대비해 업종은 전자상거래 업종으로 하는 게 좋다”며 “이 업종은 일반 주택을 사무실로 쓰는 경우가 많아 의심을 덜 받기 때문”이라고 안내했다.
A씨는 “제2금융권이라 금리가 높을 줄 알았는데 연 3%대면 충분히 빌릴 수 있었다”며 “오히려 은행에서 받는 주담대 금리와 비슷하거나 낮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최근 2년간 제2금융권의 개인사업자 대출을 통한 주택담보 대출이 급격히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 당국이 은행권 주담대 규제를 강화하자 제2금융권을 통해 규제를 비켜가는 풍선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11일 윤두현 국민의힘 의원이 확보한 4개 저축은행(상상인, 상상인플러스, 애큐온, 예가람)의 개인사업자 주택담보 대출 잔액은 올해 7월 말 기준 1조9107억원이었다. 2019년 말(5587억원)에 비해 3.4배로 급증한 것이다.
◇올해도 개인사업자 주담대 7개월 만에 2배
개인사업자 대출은 자영업자들이 사업 자금 마련을 위해 신용이나 물건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방식이다. 그러나 정부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주택 가격을 잡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가계 대출 규제책을 내놓으면서 사업자가 아닌 사람이 사업자 등록을 한 뒤 개인사업자 대출로 주택 자금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특히 정부가 15억원 초과 고가 주택에 대한 주택담보 대출을 전면 금지한 2019년 12월 이후 서울 강남권을 중심으로 개인사업자 대출이 급증했다. 지난해 개인사업자 수도 많이 늘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6~2019년 4년간 162만명 전후에서 맴돌던 국내 개인사업자 수는 지난해 171만명으로 증가했다.
상상인·상상인플러스·애큐온·예가람 등 4개 저축은행의 개인사업자 주담대 잔액은 2018년 5159억원에서 2019년 5587억원으로 소폭 늘어나는 데 그쳤다. 하지만 2020년 말에 1조338억원으로 거의 2배가 됐고, 올 들어서도 7개월 만에 갑절로 불어났다. 상상인저축은행의 경우 개인사업자 주담대 잔액이 2019년 17억원에서 올해 7월 3447억원으로 200배 넘게 급증했다.
저축은행 관계자는 “사업 자금이 필요한 실수요 개인사업자도 늘어나긴 했겠지만 사실상 주택 구입 자금을 우회적으로 마련하려는 수요가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며 “다만 돈에 꼬리표가 없기 때문에 대출받은 돈을 주택 구입에 썼는지 사업 자금으로 썼는지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실수요자 피해 최소화할 핀셋형 대책 필요
집값이 비싸 은행 대출을 받기 어려운 서울 강남권에서는 부동산과 연계한 개인사업자 대출 상담이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개인사업자 대출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대출 모집인과 세무사는 물론 저축은행 영업점 직원까지 투입된다. 이들은 금융사와 금융 당국, 국세청의 감시를 피해갈 수 있는 방식도 상세히 안내해주고 있었다.
금융 당국은 문제가 있긴 하지만 섣불리 손쓰기는 어렵다는 분위기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일일이 사업장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 개인사업자 대출을 틀어막을 경우 정말 사업 자금이 필요한 선의의 자영업자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윤두현 의원은 “정부가 집값을 잡겠다면서 주택 공급을 늘리지 않은 채 금융권 팔을 비틀어 대출만 틀어막다 보니 제2금융권의 편법 대출이 늘어나게 된 것”이라며 “과도한 가계 대출 규제는 완화하고, 개인사업자 대출은 실수요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범위에서 제2금융권 대출 심사를 강화해 주택 구입 목적의 사업자 대출은 걸러내는 핀셋형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