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시작과 동시에 3000선 밑으로 흘러내린 코스피가 최근 두 달 가까이 2600~2800포인트 사이의 박스권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수가 2500까지 밀릴 수 있다는 예상도 나왔지만, 외국인은 팔고 개인은 사들이는 치열한 공방 속에 2600대 초반에서 저지선이 형성됐다.
그렇다고 지수가 상승 탄력을 받은 것도 아니다. 불안한 유가 급등락과 인플레이션 우려 속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파월 의장이 잊을 만하면 금리를 큰 폭 올릴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면서 코스피는 매우 좁은 200포인트 상자 안에 갇힌 ‘박스피’ 모양새가 됐다.
◇잦아든 빚투… 모두 특판예금에 줄 섰나요
2월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36.45포인트까지 치솟았던 월가 공포지수(시카고옵션거래소 변동성지수·VIX)가 지금은 23.53으로 떨어진 상태다. 그만큼 투자 심리 지표가 안정됐는데도 주가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일단 거래 대금에서 찾을 수 있다.
작년 1월 초 코스피 지수가 3000포인트를 뚫고 올라갈 때 하루 거래 대금은 44조원(2021년 1월 11일)에 달했다. 이날은 삼성전자 한 종목 거래 대금만 8조3792억원이었다. 그런데 지난 22일에는 코스피 전체 거래 대금이 8조3879억원으로, 1년 전 삼성전자 한 종목 거래 대금과 비슷했다.
올 초만 해도 하루 거래 대금은 20조원대였는데 최근엔 반 토막 수준이 됐다. 동학개미가 서학개미로 대거 전향해서도 아니다. 작년 해외 투자가 가장 많았던 11월에 하루 해외 주식 거래액은 36억달러(4조5000억원)였는데, 최근엔 이 규모도 15억달러(1조8200억원)로 절반 이상 줄었다.
결국 금리 인상기를 맞아 ‘빚투’가 눈에 띄게 줄어든 데다 투자자들이 주식 대신 예금으로 대거 몰려간 결과로 보인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21일 기준 증권사에서 돈을 빌려 투자하는 신용거래융자 잔고는 21조5000억원으로, 한창 주식시장이 뜨겁던 작년 8월보다 3조5000억원 줄었다.
증시를 떠난 사람들은 고금리 특판적금으로 몰려가고 있다. 최고 연 7% 금리를 주는 BNK저축은행 특판적금은 모집 시작과 동시에 서버 다운 사태까지 벌어졌고, 3~5%대 이자를 주는 신협 새마을금고 특판 예·적금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팽팽한 줄다리기 속 ‘도로 박스피’
향후 증시에 대한 전망은 긍정론과 비관론으로 팽팽하게 갈린다. 먼저 주가를 더 끌어내릴 수 있는 요인은 인플레이션이 촉발할 수 있는 경기 둔화다. 미 연준은 지난 16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올해 미국 성장률 전망을 4.0%에서 2.8%로 1.2%포인트나 낮춰 잡았다. 전쟁이 촉발한 고유가 상황이 소비를 위축시켜 성장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본 것이다. 한국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는 22일 같은 이유로 올해 우리나라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3.0%에서 2.7%로 낮췄다. 성장률이 저공 비행을 하면 주가도 추가 하락 압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경기 둔화가 현실화되는지 여부를 엿볼 수 있는 금융시장의 가늠자는 장단기 금리 간 격차(미국 국채 10년물 금리-2년물 금리)가 될 전망이다. 이 수치가 딱 붙어서 역전까지 간다면 경기 둔화가 곧 닥칠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예금처럼 채권도 만기가 길수록 금리가 높은 게 일반적이지만, 조만간 경기가 나빠질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면 불안해진 투자자들이 상대적으로 안전 자산인 장기 채권에 몰려 장기 채권 가격이 상승(장기 채권 금리는 하락)하게 된다. 실제 1978년 이후 5번의 장단기 금리 역전 사례마다 경기 침체가 뒤따랐다. 21일(현지 시각) 이 차이는 18bp(0.18%포인트)로 2020년 3월 초 이후 가장 좁다.
박스를 위로 돌파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염동찬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원·달러 환율이 하향 안정(원화가치 상승)된다면 외국인, 특히 미국계 자금이 순매수로 돌아설 수 있다”고 했다. 팬데믹 초기인 2020년 3월 이후 지금까지 외국인은 유가증권시장에서 40조원을 순매도해 금융 위기 때의 순매도 기록(65조원)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셀 코리아를 지속하고 있다. 이게 지수의 박스권 탈출을 발목 잡는 주요 원인 중 하나다. 하반기에 유럽 등 다른 주요 국가도 금리 인상에 동참해 달러 강세가 완화되면 미국계 자금이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원화 강세 구간에서 외국인은 환차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