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방어주마저 상승 여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제는 인플레이션과 연준의 금리 인상이 문제가 아니라 경기 침체를 걱정하는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의 최고투자책임자(CIO)인 마이크 윌슨은 최근 투자자들에게 이런 내용의 노트를 보냈다. 현재 주식시장이 팬데믹 초기 주가가 치고 올라가던 2020년 4월과 정반대 상황에 있으며, 곧 경기가 빠르게 꺾여 많은 기업이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암울한 얘기를 가득 담았다.
◇주식 발 빼고, 현금 비중 높여라
코로나 팬데믹 이후 “TINA(There Is No Alternative·주식 외엔 대안 없다)를 외치던 세계 투자자들이 안전지대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본격적인 금리 인상이 시작된 데다, 최근 중국의 코로나 확산세로 세계 경기 침체 우려마저 커지면서 투자심리가 급격히 얼어붙었다. 올 들어 미국 S&P500 지수가 12.4%, 나스닥이 20.2% 하락했고, 유럽과 아시아 주요 지수도 예외 없이 10%가량 미끄러졌다.
미국을 비롯해 주요국 대형 기업들의 실적이 1분기엔 예상보다 좋았지만, 금리 인상과 물가 급등으로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앞으로는 실적이 나빠질 일만 남았다는 우려도 확산하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최근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현금 보유량을 늘렸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5일(이하 현지 시각) 보도했다. 릭 라이더 블랙록 최고투자책임자(CIO)는 “과거보다 훨씬 더 (현금에) 가중치를 부여해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현금 보유량을 50% 이상 늘렸다. 앞으로 최소 2개월에서 6개월은 주식시장에 지금과 같은 변동성이 이어질 것”이라며 “현재로서는 인내심을 갖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대형 자산운용사인 스테이트스트리트 어드바이저스의 가우라브 말릭 수석 투자전략가도 “기대수익률을 감안하면 지금은 현금이 왕”라며 “연초보다 현금 보유 비중을 50% 이상 늘렸다”고 말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최근 글로벌 자산운용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이들의 현금 보유 비중 역시 2020년 4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설문 응답자의 절반 정도인 47%가 현금 보유량을 늘렸다고 답했고, 이 비율은 올 들어 빠르게 높아지는 추세다.
◇증시에서 피난한 자금 급증
주식시장에서 탈출한 돈은 단기 자금 시장인 머니마켓펀드(MMF)로 흘러들고 있다. 미국 자산운용협회(ICI) 통계를 보면 ‘프라임 MMF’ 규모는 2월 말 1460억 달러에서 지난달 1930억 달러로 32% 늘어났다. 프라임 MMF는 정부채뿐만 아니라 회사채, 양도성예금증서(CD), 기업어음(CP) 등에도 투자하는 MMF로 정부채만 투자할 수 있는 정부 MMF와 구분된다. 지금 같은 금리 인상기에 금리가 오르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어 주식에서 빠진 자금의 대피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몇 년간 주가가 조정을 받을 때마다 ‘저가 매수’에 나서며 현금 비중을 줄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라고 분석했다.
투자은행 스스로도 현금 보유를 늘리며 방어적 경영에 나섰다.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은 지난 13일 1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대손충당금을 9억200만 달러 늘렸다고 말했다. 경기침체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향후 투자 손실에 대비해 비상금을 두둑하게 쌓아놓았다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국내라고 예외가 아니다. 은퇴생활자인 60대 이모(서울 용산구)씨는 최근 만기 상환된 ELS(주가연계증권) 투자금을 재투자하는 대신 6개월 미만 단기예금에 넣었다. 미국 주식 추가 매입도 중단했다.
한 시중은행 PB(프라이빗 뱅커)는 “일단 연준의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은 지나고 보자는 심리가 강한 듯하다”며 “S&P500 기준으로는 4000선까지 떨어질 때까지 일단 기다려보겠다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26일 기준 S&P500은 4175.2까지 하락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