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에 다니면서 이런 말 하면 욕먹기 딱 좋긴 한데, 사실 저도 한국 주식은 안 한 지 좀 됐어요. 테슬라에만 몇 년째 돈 넣고 있어요.”
한국에 별로 사고 싶은 종목이 안 보여서 미국 주식에만 투자하고 있다는 김모(52) 상무. 요즘 이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올 들어 2일까지 개인 투자자는 하루 평균 약 1조7800억원의 해외 주식을 거래했다. 같은 기간 하루 평균 코스피 개인 거래 대금의 14%가 넘는 규모로, 역대 최고 수준이다.
외국인뿐 아니라 개인 투자자까지 한국 증시를 등지면서, 우리나라 증시가 다시 고질적인 저평가의 늪에 빠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시 찾아온 ‘코리아 디스카운트’ 망령
3일 한국거래소와 대신증권에 따르면 한국 코스피의 PER(주가수익비율)과 PBR(주가순자산비율) 등 주요 투자지표가 선진국 평균은 물론이고 신흥국 평균치보다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2일 기준 코스피 전체 PER은 11.1배, 코스피200의 PER은 9.8배로 각각 1년 전 대비 반 토막 났다. 1년 새 기업들의 이익이 눈에 띄게 늘어났지만, 주가는 그만큼 오르지 않았거나 오히려 떨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PER은 기업의 순이익을 현재 주가 수준과 비교한 것으로, 이 수치가 낮을수록 저평가됐다는 의미다.
미국 주식시장 PER은 21.8배, MSCI(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 선진국지수에 속하는 23국 평균 PER은 18.4배 수준이다. MSCI 신흥 24국 평균도 12.3배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다. 대만·중국은 물론이고 칠레·페루·남아공·필리핀 등 증시 규모가 훨씬 작은 나라의 PER도 우리보다 높다.
작년만 하더라도 한국 PER(24.1배)은 신흥국 평균(21.5배)보다 높았다. 중국(19.4배)이나 브라질(18.9배), 대만(23배)보다 제값을 평가받았지만, 최근 들어 다시 심각한 ‘코리아 디스카운트’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또 다른 투자지표인 PBR의 경우 한국은 1.0배로 시가총액이 장부상 순자산가치와 똑같은 수준에 그쳤다. 신흥국 평균 PBR은 1.6배, 선진국은 2.8배 수준이다. 실적이 좋아 상장사들이 가진 자본이 늘어났지만, 주가는 역주행한 결과다.
◇내국인·외국인, 이구동성으로 “한국 시장 매력 없어”
이렇게 된 데는 미국 금리 인상기를 맞아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시장에서 떠난 것이 영향을 미쳤지만, 개인 투자자들마저 우리 증시를 외면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로 꼽힌다. 올 들어 코스피 시장에서 개인들의 하루 평균 거래액(12조5070억원)은 지난해의 64% 수준에 불과하다.
개인 투자자들이 갑자기 돈이 없어진 건 아니다. 이들은 6개월 미만 단기 예금과 CMA(종합자산관리계좌) 등에 돈을 넣어둔 채 한국 주식을 사지 않고 관망하고 있다. 주부 문모(62)씨는 “한국 주식에 투자해봐야 결국 ‘박스피(박스+코스피)’에 갇혀서 자산 증식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는 경험이 쌓였다”면서 “미국 주가지수는 100년 동안 계속 올랐기 때문에 비교가 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LG화학의 LG에너지솔루션 ‘쪼개기 상장’으로 불거진 물적분할·동시상장 문제, 쌍용차 인수를 놓고 벌어지는 혼탁한 투기 세태, 대주주에만 유리한 합병 아니냐는 논란이 대두된 동원산업·동원엔터프라이즈 합병 등 우리 증시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이슈가 산적해 있다고 지적한다.
블래쉬자산운용 백지윤 대표는 “미국 펀드 매니저들과 얘기하다 보면 한국 증시가 해외 대비 유독 저평가되는 이유로 전쟁 리스크를 꼽거나 MSCI 선진국 지수에 편입이 안 돼서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며 “대부분이 기업 거버넌스(지배구조)가 후진국형이기 때문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는 “전쟁 리스크는 한국보다 대만이 훨씬 큰데 대만의 평균 PER이 한국보다 높은 것도 이 이유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국내 투자자들이 갈수록 해외 투자로 쏠리고 있기 때문에 이제 우리나라 거래소는 해외 거래소와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고 말했다.
☞PER과 PBR
PER(Price Earning Ratio·주가수익비율)은 주가를 주당순이익으로 나눈 것, PBR(Price Book Value Ratio·주가순자산비율)은 주가를 주당순자산으로 나눈 것을 말한다. 현재 기업의 주가가 주당순이익이나 자산가치에 비해 얼마나 높게 혹은 낮게 형성돼있는지를 보는 척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