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가상화폐 거래소들이 최근 가격 폭락으로 가상화폐 시장에 충격을 준 루나에 대한 상장 심사 과정에서 위험성을 과소 평가하는 등 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22일 본지가 입수한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 2곳의 루나와 테라에 대한 상장평가 보고서(2019년)에 따르면, 알고리즘으로 테라 가격을 1달러에 고정시키겠다는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은 보고서에 단 한 줄도 없었다. 거래소들은 루나와 테라가 상장한 뒤 3년이 흘러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최근 “알고리즘이 적정하게 작동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또 이달 초 루나 사태가 터진 후 일주일간 국내 1·2위 거래소인 업비트와 빗썸이 루나로 벌어들인 수수료만 최소 8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거래소들은 상장폐지를 앞둔 루나와 테라로 막대한 돈을 벌면서도 투자자들에게 위험성을 알리는 일은 소홀히 한 것이다. 루나에 투자한 국내 투자자들은 작년 말 9만명에서 지난 15일 기준 28만명으로 급격히 늘었다.
◇“리스크 있다”면서도 턱걸이 통과시켜… 달러와 연동된 코인 알고리즘 보고서엔 한줄도 분석 없어
루나는 자매 코인 테라의 가격이 개당 1달러에 고정되도록 설계된 코인이다. 테라 한 개를 팔면 1달러어치 루나를 받는 식이다. 발행사 측은 테라 가격에 연동된 루나 가격이 오르면 발행 물량을 늘리고 가격이 떨어지면 기존 발행 물량을 소각하는 방식으로 루나와 테라 가격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달 초 한 투자자가 8500만달러 규모의 테라를 대량 매도하면서 테라 가격이 0.98달러로 내려갔다. 알고리즘대로라면 차익을 노리고 투자자들이 테라를 샀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투자자들이 탈출하듯 팔기 시작하면서 루나 가격이 폭락했다.
2019년 테라와 루나를 상장시킨 A거래소의 상장평가 보고서에는 이 같은 투자 위험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테라에 대해 “거래 유인이 덜하고 새로운 시도에 대한 리스크가 존재한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거래소는 “(테라는) 국내외적으로 주목을 많이 받은 프로젝트”라면서 100점 만점에 60점을 줬다. 60점은 이 거래소 상장 커트라인(최소 합격점)이다. 테라는 투자 위험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평판 덕분에 겨우 ‘턱걸이’를 한 것이다. 루나는 360억원을 투자받아 놓은 덕분에 12점 가산점을 받아 78점을 획득했다.
B거래소의 보고서에는 테라와 루나의 위험성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었다. B거래소가 작성한 루나 상장 검토 보고서에는 “대형 유통업체와 파트너십을 맺어 블록체인을 활용한 결제 시스템을 제공할 예정이고, 루나는 가격 안정화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고 평가했다.
◇거래소들, 상장 후 3년 지나 “스테이블 코인 주의” 뒷북
테라·루나와 같은 스테이블 코인이 가치를 상실하고 대량 인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경고는 지난해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 산하 금융시장 실무그룹은 지난해 11월 ‘스테이블 코인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스테이블 코인이 기대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단순한 전망만으로도 해당 코인의 대량 인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며 “스테이블 코인 보유자들이 불안감에 상환을 요구하면 발행자는 준비 자산을 헐값에 내다 팔 수밖에 없고, 이렇게 되면 더 불안해진 투자자들은 더욱더 상환을 요구해 준비 자산의 투매가 심화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국내 거래소들은 이번 루나 사태로 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상장된 관련 종목들의 내역을 공지하고 유의사항을 안내하고 나섰다. 업비트는 18일 “스테이블 코인 및 스테이블 코인과 연동되는 기능을 가진 디지털 자산은 알고리즘이 적정하게 작동하지 않는 경우 급격한 시세 변동이 발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빗썸 등 다른 거래소들도 유사한 내용을 담은 경고문을 공지했다.
업비트와 빗썸이 현재 거래를 지원하는 스테이블 코인 관련 종목은 각각 13개, 10개다. 코인원과 코빗은 루나를 포함해 각각 8개, 6개 종목의 거래를 지원한다. 고팍스는 지난 16일 루나와 테라를 상장폐지했고, 스테이블 코인 거래를 지원하지 않는다.
당정과 업계는 23~24일 루나 사태와 관련한 간담회를 연다. 여당에서는 성일종 정책위의장과 윤창현 가상자산특별위원장, 정부 측에서는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등이 참석한다. 업계에서는 5개 거래소 대표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은 “거래소별 불투명한 기준과 심사 결과를 비공개하는 행태가 부실 코인의 상장과 투자자 피해로 이어졌다”며 “당분간 거래소들은 무리하게 새로운 코인을 상장하기보다 ‘제2의 루나 사태’를 발생시킬 코인이 없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