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의 시가총액은 기업들이 가진 자산 가치를 합친 것보다 적습니다. 대만은 물론이고, 베트남이나 남아공 같은 신흥국도 이렇지 않아요. 유독 한국 증시가 저평가되는 이유를 찾아봤더니 한국만의 문제가 있더군요.”
그래서 로펌을 다니던 변호사가 거리로 나섰다고 했다. 올 들어 ‘세이브(Save) 코스피<아래 사진>’ 운동을 벌이는 김규식(54)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서울대 법대 88학번 출신 금융 전문 변호사였다. 국내 자산운용사를 대상으로 자문 업무를 하다가, 7년 전부터 직접 투자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그의 표현대로 번번이 ‘당했다’. 기업 인수합병(M&A) 과정에서 의무공개 매수제도가 없다거나, 합병 비율이 터무니없이 낮은 시가로 결정됐다거나, 인적분할하는 과정에서 지배주주 지분율이 확 늘어나는 등 기업 지배 구조와 관련해 일반 주주의 권리가 침해되는 사례들을 몸소 겪었던 것이다.
김 회장은 “변호사의 직업적 직감으로, 주주 권리가 침해되는 위법 행위가 우리 시장에 너무나 만연해있다는 걸 알게 됐다”며 “다른 나라는 어떤지 국내외 자료를 찾아가며 공부했더니, 이게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자산운용사 대표 등 70여 명이 모여 사단법인 형태의 포럼을 2019년 만들었다. DB자산운용의 장덕수 회장, 라이프자산운용 이채원 의장, 연세대 이남우 교수 등이 주요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는 “기존에 있던 단체들이 재벌 개혁에 초점을 뒀다면, 우리는 순수하게 투자자 보호가 목적이다. 경영권 승계도 반대하지 않는다. 누구든 능력 있는 사람이 승계하면 되지, 그게 창업자 후손이라고 막을 이유가 뭔가”라고 반문하며 “다만 주주가 기업의 미래에 투자하며 위험을 부담하고 있으니, 그에 상응하는 주주 보호 장치들을 도입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달 29일 기준 한국 코스피 상장사들의 평균 주가순자산비율(PBR)은 0.96으로 1을 밑돈다. 이 수치가 1보다 낮다는 것은 그만큼 기업 시장 가치가 저평가돼 있다는 의미다. 그는 한국만의 독특한 기업 거버넌스(지배구조) 문제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합병, 분할, 자진 상장 폐지, 지주회사 전환 등 굵직한 자본 거래와 다양한 특수 관계자 거래 과정에서 일반 주주와 기관 투자가들에게 마땅히 배분돼야 할 이익이 소수의 지배주주에게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올 들어 기업 거버넌스 관련 이슈들을 하나씩 분리해 매월 한 번꼴로 세미나와 포럼을 열고 있다. 지난 4월에는 동원산업이 비상장 지주회사인 동원엔터프라이즈와 합병하는 과정에서 대주주에게 유리하도록 합병 비율을 산정한 문제를 지적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결국 소액주주들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문제를 지적받고 합병 비율을 조정한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님 같은 분은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죠. 사실 많은 주주로부터 감시받는 대기업은 오히려 이런 문제가 적은데, 감시받지 않는 작은 기업으로 갈수록 지배구조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그는 동학개미들이 시장에 대거 진입한 지금이 한국적 기업 지배구조 문제를 고칠 절호의 기회라고 봤다.
김 회장은 “대통령이 국민의 대표자이듯, 경영권을 가진 대주주는 주주들의 리더이고 가장”이라며 “대주주들이 그런 마음으로 기업을 이끌면, 위기가 와도 주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지속적으로 투자해 같이 성장의 과실을 따먹을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주주들이 먼저 변한다면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 상속·증여세율을 현실화하는 문제 등을 공론화하는 데 힘이 실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고 65%에 달하는 경영권을 상실하는 수준의 상속·증여세를 피하기 위해 일감 몰아주기 등을 통해 자녀에게 자본을 이전하는 일이 왕왕 벌어지고 있고, 현실적으로 이런 구조를 막아야 주주 피해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대만이 우리보다 제도적으로 나은 게 없지만 우리 주식시장보다 높게 평가받는 것은 주주를 보호하고 상생하는 분위기가 형성돼있기 때문”이라며 “우리 기업가들도 충분히 그럴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