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같이 경기 침체 불안이 시장을 덮칠 때 대표적 안전 자산으로 각광받던 금이 최근 ‘금빛’을 잃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지난 3월 반짝 상승한 국제 금값은 6개월 연속 떨어져 최근엔 2년여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는 등 폭락세를 보이는 것이다. 최근 이례적 강(强)달러·고금리 현상으로 맥을 못 추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3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 7~9월 3개월간 뉴욕상품거래소 금 가격(12월 선물)은 온스당 1807.3달러에서 1672달러로 7.4% 떨어졌다. 지난 3월 연고점(2043달러) 대비로는 18% 하락했다. 특히 지난달 26일엔 1633달러까지 떨어져 지난 2020년 4월 이후 2년 5개월 만에 최저점을 경신했다.
이에 따라 금 가격에 연동되는 상장지수펀드(ETF) 등 각종 금융 상품 가격도 급락 중이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의 ‘TIGER 골드 선물 ETF’는 지난 3개월간 8.7% 손실률을 기록했고, 가격 흐름을 2배로 반영하는 레버리지 상품인 한국투자신탁운용의 ‘KINDEX 골드 선물 레버리지 ETF’는 가격이 17.6%나 떨어졌다. 최근 국내 증시 폭락을 접하고 ‘경기 침체=금(안전 자산) 투자’의 공식을 적용해 금에 투자한 투자자들은 낭패를 보고 있는 것이다.
◇'킹달러’가 내리누른 금 가치
금은 통상적으로 경기 침체 불안으로 각종 금융 상품이 추락할 때 안전한 가치 저장 수단으로 빛을 발한다. 그 자체가 희소성이 있고, 전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되기 때문이다. 또 금은 현물이기 때문에 화폐 가치가 하락하는 고물가 시기에 ‘인플레이션 헤지(위험 회피)’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그런데 고물가와 경기 침체 우려가 겹친 요즘, 금이 뜻밖에도 힘을 못 쓰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1200원대로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4월 중순까지만해도 금값은 역대 최고점에 근접한 1900달러 선이었다. 그러다 이른바 ‘킹달러’ 현상이 심화하면서, 금 가격이 짓눌리기 시작했다. 달러 역시 전통적 안전 자산으로 통하는데, 최근 달러 강세로 수익까지 내자 금이 경쟁에서 밀렸다는 것이다.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1400원을 돌파하면서 달러 레버리지(2배) ETF의 1개월 수익률은 15%에 육박하고 있다.
고금리가 금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측면도 있다. 금은 안전하긴 하지만, 갖고 있어도 이자는 한 푼도 안 붙는다. 그런데 최근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연속적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 여파로 한국은행도 기준금리를 2.50%까지 올리자, 안전한 투자처를 찾는 개미들이 예·적금이나 채권으로 몰려갔다는 것이다. 5대 시중은행의 정기 예·적금 잔액은 지난달 초부터 3주 만에 17조3800억여원이나 불어났다.
◇전문가 “금값 더 떨어진다…내년 이후 매수 추천”
그렇다면 지금이 ‘저점 매수’ 타이밍일까. 전문가들은 “금값이 더 떨어질 수 있어 위험하다”고 말한다. 미 연준이 올 하반기까지 금리 인상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섣불리 들어갔다가 마치 요즘 주식처럼 ‘바닥 밑의 지하실’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황병진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연준의 공격적 긴축 정책이 잦아들 것으로 보이는 내년 1분기 이후에 금을 매수하는 것이 안전해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금값 등락과 반대로 움직이는 인버스 ETF는 수익을 낼 수 있다.
가격이 꺾인 금, 변동 폭이 큰 달러 말고 다른 안전 자산을 찾는 개인 투자자도 많아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증권사 발행 어음이다. 증권사의 자체 신용으로 발행하는 어음으로, 만기가 최장 1년으로 짧고 최근 고금리로 약정 이율이 높다. 지난달 한국투자증권이 출시한 연 최고 4.5% 이율의 특판 발행 어음은 나흘 만에 2000억원어치가 판매됐다. 단기 금리를 추종해 금리가 마이너스로 떨어지지 않으면 손실 날 일이 거의 없는 금리 추종형 ETF 상품도 최근 인기다. 한 금융업계 관계자는 “전통적인 안전 자산인 금이 달러 초강세에 밀려 제 역할을 못하면서, 이를 대체하는 각종 저(低)리스크 상품이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