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시장 경색 현상이 그동안 한국경제에 누적된 부채들 때문에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진은 지난 11월 1일 서울의 한 시중은행에서 직원들이 5만원권 지폐 더미를 운반하는 모습./연합뉴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가 금리를 대폭 올리면서 한국의 기준금리보다 1%포인트나 높아졌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해외 투자자의 자금이 고금리를 쫓아 미국으로 빠져 나갈 것이라는 걱정이 많다. 더구나 강원도 레고랜드와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사태에서 보듯이 국내 금융시장이 자금난으로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미국이 금리를 앞으로 더 올리면 국내의 해외 투자자 자금들은 과연 빠져 나갈까? 국내 금융시장의 자금난은 어느 정도일까?

자금시장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사람들은 채권 트레이더들이다. 금리 변화에 따라 채권 가격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때마다 그들은 채권을 사거나 팔아 이익을 내거나 손해를 본다. 채권시장 동향을 잘 아는 전문가를 찾았더니, 여러 트레이더들이 추천한 명단들 속에 약방의 감초처럼 꼭 들어가 있는 사람이 있었다. 유창범 KB국민은행 자산운용1본부장.

그래서 지난 11월 8일 오후 1시 25분, 서울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50 한국교직원 공제회관의 철통 보안문들을 뚫고 들어가 3층 본부장실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널찍한 사무실이 텅비어 썰렁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가 건넨 명함의 주소에 ‘4층 국민은행 트레이딩부’라고 적혀 있었다. 유 본부장은 “평소에는 대부분 4층 트레이딩 룸에서 지낸다”고 말했다.

—채권 트레이더 업무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학교 졸업 후 1995년에 장기신용은행 외화자금부 행원으로 외환 트레이더 생활을 시작했다. 1998년 JP 모건 서울지점으로 이직했다가, 체이스 맨해튼 은행과 JP 모건이 합병한 후 2001년 뱅크 오브 아메리카(BofA)로 옮겼다.

초기에는 팀원으로 외환 트레이딩을 했는데, 이후 FICC(Fixed Income, Currency and Commodities) 팀의 팀장이 되면서 외환과 채권 트레이딩을 같이 하게 됐다. 채권 거래를 본격적으로 한 것은 약 19년 정도 됐다.”

—외환과 채권 거래를 동시에 하는 일이 흔한가?

“환율과 이자율(금리)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외환 거래를 할 때 선물환 거래를 하면 선물환 가격을 결정하는 요인 중에 두 나라의 이자율이 들어간다. 그래서 대부분의 금융회사들은 외환 거래와 이자율 거래 업무를 같이 붙여 놓고 있다.”

채권·외환 거래가 주요 업무

—지금 주로 하는 일은?

“이자율과 외환 거래를 한다. 고객들의 주문을 받아 처리하기도 하고, 은행의 자금을 갖고 직접 채권을 사고 팔기도 한다. E-트레이딩이라고 해서 고객이 웹사이트를 통해 주문을 하면 시장에서 자동으로 헤지(위험 회피)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개발 중이다. 내년 1분기에 정식으로 운용할 예정이다.”

—밑에 직원들이 모두 몇 명이나 되나?

“50명 정도 된다. 외환 트레이더, 채권 트레이더, 이자율 파생상품 트레이더, E-트레이딩 개발자 등이다.”

이자율 파생상품이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렸다. 그래서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기로 했다.

채권 트레이더들은 채권 거래를 중개하면서 동시에 금리 변동에 따른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이자율 스왑 등 각종 헤지 거래도 동시에 하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KB국민은행 트레이딩 룸./KB국민은행

—이자율 파생상품 거래가 뭔가?

“이자율 거래는 채권 거래이다. 주식도 거래할 때 주가지수 선물, 주가지수 옵션 등 파생상품이 있지 않나? 채권도 국채 선물, 고정금리와 변동금리를 주고 받는 이자율 스왑, 그리고 채권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옵션 상품이 있다.”

—어려운 개념인데, 예를 들면?

“1년, 10년, 혹은 30년 만기의 액면금리 연 3%짜리 국채를 산다고 하자. 그러면 6개월마다 3%의 2분의 1씩을 고정금리로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고정금리가 아니라 변동금리를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은 3개월마다 금리가 변동하는 은행의 CD(양도성예금증서)를 가진 사람과 스왑(교환) 계약을 맺을 수 있다. 그러면 자신이 3개월마다 고정금리로 받는 이자는 건네주고, 상대로부터 3개월마다 변동된 이자율로 받는 이자는 건네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이자율 스왑이다.”

은행은 단기 자금 조달을 위해 채권의 한 종류인 양도성 예금증서(CD)를 발행해 유통시키는데, 3개월 만기 CD 금리는 고객들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때 변동 금리의 기준으로 많이 쓰인다. 사진은 한 시중은행의 CD 견본./조선일보 DB

—왜 이런 복잡한 거래를 하나?

“금리 변동에 따른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기업들 가운데에는 해외에서 변동금리로 채권을 발행해 달러를 조달한 뒤 원화로 바꾸어 사업자금으로 사용하는 곳이 많다. 그런데 이 회사들이 금리 변동에 따른 위험을 피하기 위해 고정금리로 이자를 지급하고 싶을 때, 은행에 의뢰해 달러-원화를 바꾸면서 이자율 스왑 계약까지 해 헤지(위험 회피)를 하게 된다.”

—만약 ‘10년짜리 스왑’이라고 말하면 한번 스왑 계약을 하면 10년간 유효하다는 뜻인가?

“그렇다. 10년 만기 고정금리와 3개월짜리 변동금리를 매 3개월마다 교환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스왑계약의 변동금리는 매 3개월마다 결정된다.”

유 본부장은 이 대목에서 스왑 거래때 사용되는 무위험 변동금리(SOFR, Secured Overnight Financing Rate)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나 너무 복잡한 내용인 듯 해 생략한다. 다시 그의 업무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갔다.

수조원 어치 채권 운용

—유 본부장이 운용하는 자금 규모는?

“외환 거래는 현물환은 하루에 4억~5억달러, 선물환까지 포함하면 10억달러가 넘을 것이다. 이 가운데 고객의 주문에 따라 사고 파는 거래가 70~80% 정도 되고, 나머지 20~30%는 우리 은행의 자금으로 이익을 내기 위해 거래를 한다.

채권 거래의 경우 주로 은행 자금으로 한다. KB국민은행은 40조~50조원 어치의 국채, 공사채, 회사채를 보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수조원 정도를 우리 본부가 운용하고 있다. 자산의 운용 규모로 따지면 4대 금융지주회사들이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뉴욕의 월스트리트에서는 미국 국채와 전세계의 달러 표시 채권들이 대량으로 거래된다. 지난 11월 10일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트레이더가 일하고 있는 모습./AP 연합뉴스

—고객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인가?

“외환 쪽은 국내 여러 기업들과 보험사, 증권사, 카드회사 같은 비은행 금융회사들이다. 최근에는 개인의 해외투자가 활발해지면서 개인 고객들의 거래도 늘고 있다. 이자율 쪽은 비은행 금융회사가 주요 고객이고, 제조업체도 있다.”

—개인 고객은?

“채권의 경우에는 감독 당국의 허가 규정 상 은행은 개인 고객과 직접 거래할 수 없다. 개인 고객과의 거래는 증권사가 담당한다.”

채권시장 3대 특징

유 본부장의 업무에 대해서는 충분히 물어봤다. 인터뷰 주제인 채권시장 동향에 대해 질문을 시작했다.

—요즘 채권시장의 특징을 3가지 든다면?

“첫째, 지난 40년 동안 보지 못하던 인플레이션(물가상승) 현상이 전세계적으로 나타나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금리를 올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물가상승률도 지난 20년 동안 못봤던 수준이다.

둘째, 무위험 금리, 그러니까 중앙은행의 기준금리와 정부가 발행한 국채의 금리가 오르면서 다른 신용 위험(부도 가능성)이 있는 채권들의 신용 스프레드(가산금리)가 벌어지고 있다. 즉 금융회사나 기업들이 발행하는 채권의 금리는 기준금리에 신용 스프레드를 더해 결정되는데, 기준금리가 상승하면서 이 가산금리도 커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기준금리도 오르고 가산금리도 오르니 채권의 전체 금리가 오를 뿐 아니라, 채권 발행 기업의 부도 가능성에 따라 채권별 금리 격차도 더 커지고 있다.

셋째, 지난 몇 년간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세계에 부채가 많이 늘었다. 그래서 금리 인상에 따라 채권 발행자들의 이자 부담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의 금리 인상은 전세계 채권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금리가 올라가면 채권 가격은 내리고, 금리가 내려가면 채권 가격은 올라간다. 사진은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 본부./위키피디아

세가지 특징에 대해 하나씩 물어보기로 했다.

—물가가 급등한 원인은?

“사람들은 대체로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추고 유동성(자금)을 많이 풀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중앙은행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돈을 많이 풀었다. 금리를 제로(0) 수준으로 내렸고, 이후 돈을 더 풀기 위해 국공채를 중앙은행이 직접 사주는 양적완화(QE)까지 했다. 유럽중앙은행은 2012년 재정위기가 발생한 이후 기준금리를 마이너스로까지 내리지 않았나? 그런데도 물가가 오르지 않았다.”

재정지출 확대가 물가상승 원인

—그런데 지금은 왜 오르나?

“글로벌 금융위기와 이번 코로나 사태의 차이는 중앙은행의 통화 확대 보다는 정부의 재정이 얼마나 많이 쓰였느냐에 있다고 본다. M2 기준으로 통화량을 분석해 보면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양적완화를 했는데도 M2 증가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 때에는 통화정책을 완화하는 동시에 재정지출까지 확대하면서 통화량이 짧은 시간내에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 기조가 오래 유지됐다. 지금 미국 연준이 통화긴축에 나섰지만 그 때 풀린 막대한 자금이 아직 시중에 떠돌고 있다.”

—재정지출 확대 외에 다른 요인은?

“물가가 오른 데에는 코로나 사태로 공급망이 교란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원자재 가격이 오른 측면도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 입장에서는 당장 관리해야 하는 막대한 통화가 눈 앞에 크게 보일 것이다. 그러니 금리를 급격히 올릴 수 밖에 없다.”

전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물가 급등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코로나 사태의 극복을 위해 정부가 지출한 막대한 재정지출이다. 사진은 코로나 극복을 위해 재정자금을 대규모로 방출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1월 8일 중간선거일에 연설하고 있는 모습./AP 연합뉴스

—정부가 재정 자금을 적게 풀었어야 하나?

“코로나 사태 때에는 그렇게 풀 수 밖에 없었다. 당장 경제가 멈춰서 근로자들이 쫓겨나고 자영업자가 망할 판이니 보조금을 줄 수 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 같나?

“달이 차면 기우는 법이다. 2차대전 이후 케인즈주의가 득세하면서 재정확대 정책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다가 1970년대 후반부터 방만한 재정이 초래한 비효율성 때문에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 마거릿 대처 총리가 작은 정부와 효율성을 강조했다. 수요보다 공급의 효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정부의 재정지출을 줄였다.

1980년대부터 2010년쯤까지 이러한 분위기가 풍미했다. 거기에 세계화가 일어나고 디지털화가 진행되면서 물가는 낮게 유지되고 생산성은 빠르게 향상됐다.”

유 본부장이 잠시 숨을 돌리더니 답변을 이어갔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유효수요가 부족했다. 나라는 좋아지는 것 같은데 내 월급은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반작용으로 재정지출의 증가, 공평성 향상, 최저임금의 확대 같은 정책이 생겨났다. 이러한 정책 기조가 정점을 찍은 것이 코로나 사태였다.

이러한 재정지출 확대 정책은 처음에는 효과가 좋았다. 그러나 공공 부문에서 재정을 많이 쓰면 아무래도 비효율이 생긴다. 생산성이 저하되면서 물가는 상승하니, 이제 다시 재정 효율이 중요해지는 시대가 온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건전 재정을 강조하는 배경에도 이러한 흐름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인플레이션이 이슈가 되는 한 당분간 건전재정 추세로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직격탄 맞은 채권시장

—두번째 특징으로 신용 스프레드(가산금리) 확대를 꼽았다. 원인은?

“투자자 측면에서 보자. 예금 금리가 연 2%일 때에는 금리가 워낙 낮으니 3% 금리를 주는 상품만 있어도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예금 금리가 벌써 5%가 됐다. 이 수준이라면 투자위험이 큰 채권이 7%의 금리를 준다고 해도 투자자들은 썩 내키지 않는다. 예금 금리 5% 만으로도 수익에 대한 갈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반면, 7%의 고금리를 준다고 하더라도 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투자 위험이 있는 채권들은 투자자들의 수요가 줄어들기 때문에 지급 금리를 높일 수 밖에 없다.”

—채권을 발행해 돈을 빌리는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금리가 높아지면 이자 부담이 커진다. 그래서 영업을 해서 벌어들인 영업이익으로 이자 비용도 감당하지 못하는 기업들이 더 늘어날 것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신용 위험(부도 가능성)이 더 커진다. 신용 위험이 더 높아지니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투자자들은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신용 스프레드가 예전보다 더 커지고 있다.”

중앙은행의 기준금리가 오르면서 기업들이 발행하는 회사채도 신용도에 따라 금리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사진은 대기업들의 연합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 본부 건물. 서울 여의도에 있다./뉴스1

—신용이 나쁜 기업은 시장에서 차입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뜻인가?

“그렇다. 기준금리가 높아질수록 금융시장의 신용 스프레드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금융긴축의 목표가 원래 그렇게 차입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빚에 중독된 한국

—세번째 특징으로 부채가 그동안 많이 늘었다는 점을 꼽았다. 이유는?

“한국은 2015년쯤부터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면서 가계 부채가 많이 늘었다. 선진국 중에서 GDP(국내총생산)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증가한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한 것 같다. 가계 부채 뿐 아니라 정부 부채와 기업 부채도 늘었다. 기업 부채는 가계 부채나 정부 부채보다 증가폭은 크지 않지만 그래도 증가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에 다른 대통령보다 유난히 재정 지출을 많이해 한국 정부의 체력이 약해졌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지난 5월 9일 오전 청와대 본관에서 임기 내 소회와 대국민 메시지를 담은 퇴임연설을 하는 모습./연합뉴스

—문재인 정부 때 정부 부채가 많이 늘었다. 부채 관리를 잘 했으면 지금처럼 많이 늘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보나?

“코로나 사태 때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본다. 다만 재정지출 확대를 추구하는 케인즈주의 정책 노선을 따르면 비효율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 이전에 국가채무 비율이 GDP의 40% 정도였으니 부채를 더 늘릴 여지는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재정지출의 증가, 정부개입의 증가는 어느 정도 비효율성을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지금은 재정적자 증가가 초래하는 비용이 효용보다 큰 상황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외환위기 땐 죽는 줄 알았다”

유 본부장은 1997년 외환위기 이전부터 금융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래서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 사태를 모두 현장에서 겪었다. 3가지 위기를 비교해 보기로 했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장기신용은행에서 외환 트레이더로 일하면서 단기 외화 자금을 조달했다. 1997년 1월에 한보그룹이 부도가 났을 때만 해도 외화 조달이 그럭저럭 가능했다. 그러다가 하반기에 기아차 부실이 드러나면서 해외 투자자들이 자금공급을 끊기 시작했다.

해외 차입이 많았던 종금사들이 하루 종일 전화를 걸어와 돈을 빌려 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돈이 급하다보니 6개월 만기 단기자금을 끌어들였는데, 그것도 바닥이 나서 3개월 만기, 1개월 만기 자금을 쓰다가 나중에는 하루짜리 자금을 빌려 매일매일 부도를 막아야 했다. 마지막에는 그것도 안돼, 한국은행에 가서 외환보유액을 빌렸다. 그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외환 트레이더들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기아차의 부실이 드러난 이후 달러 차입이 급속히 악화됐다고 말한다. 사진은 경기도 광명시 소하리 기아차 공장./뉴시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는 어땠나?

“위기의 진원지가 미국이어서 한국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한국은 단기 외화 차입금이 1000억달러 정도 늘면서 몇 달간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문제의 진원지가 미국인데다, 미국이 앞장 서서 금리를 내리고 유동성을 공급해줬기 때문에 2~3개월 정도 고생하다가 풀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제위기 오래 갈 듯

—지금 상황을 그 당시와 비교하면?

-외환위기 때는 한국 기업이 과잉투자를 하면서 해외 차입에 의존했던 것이 문제였다. 정부 부채와 가계 부채는 적은 편이었다. 정부 부채는 GDP(국내총생산)의 10% 이내, 가계 부채는 40% 이내였다. 반면 기업 부채가 많았다.

또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단기 외채에 약간 문제가 있었지만, 기업이 과잉투자한 측면이 크지 않았다. 그리고 외환위기 이후 진행된 구조조정으로 기업의 체력이 양호했다.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와 급속한 가계 부채 증가가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거론됐으나, 절대 규모가 크지 않아서 관리가 가능했다.”

—지금은?

“우리 나라의 부채 비율이 다른 나라 못지 않다. 가계, 기업, 정부(국가) 부문의 부채를 모두 합하면 GDP의 300% 정도 된다. 선진국 대부분의 부채 비율이 GDP의 300% 정도 되니, 우리나라의 전체 부채비율도 낮지 않다.”

—선진국과 비슷한 수준이면 큰 문제가 없는 것 아닌가?

“수준도 중요하지만 속도도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지난 몇 년간 부채 증가 속도가 매우 빨랐다. 지난 몇 년간 부채 증가율이 명목 GDP 성장률보다 많이 높았다. 이 속도를 제어해야 한다.”

—빚이 많은 상황이 금융시장에도 반영이 됐을 것 같다. 지금 금융시장 분위기를 과거 위기 때와 비교하면?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는 심하게 독감을 앓았지만 금새 지나갔다. 지금은 엄청 아프지는 않고 은근히 아프지만 쉽게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 몇 년간 고생할 것 같다.”

—무슨 뜻인가?

“앞으로 몇 년간 착실히 저금을 해서 부채 비율을 낮추는 노력을 해야 한다.”

외환위기 vs 지금

이야기의 초점을 좀 더 세부적인 자금 시장 동향으로 끌고 갔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때의 자금시장 상황을 지금과 비교하면?

“외환위기 때는 외화자금 조달이 문제였다. 은행의 입장에서 원화는 조달에 어려움이 없었다. 외화 조달이 어려웠던 이유는 기업 부채 때문이었다. IMF(국제통화기금)의 권위를 빌려서 엄청나게 기업 구조조정을 하면서 문제를 해결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는 달러 가격이 비쌌지만 달러를 구할 수는 있었다. 원화 조달도 일부 부동산 PF를 제외하고 일반 기업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단기 외화 조달과 원화 대출에 약간 문제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인플레이션(물가상승) 현상이 없어서 금리를 대폭 내리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는 한국 기업의 부실이 문제가 됐고, IMF(국제통화기금)가 대대적인 금융-기업 구조조정을 하면서 문제를 해결했다. 워싱턴 D.C.의 IMF 본부 건물./위키피디아(2006년 6월 26일)

—지금은?

“달러의 경우 가격은 높지만 구할 수는 있다. 사실 달러 가격이 높아지기는 했으나,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에 비하면 그렇게 높아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 원화는 사정이 다르다. 2~3주 전에는 신용등급이 AA나 A인 우량 기업이나 금융회사들이 국내 시장에서 채권을 발행할 수 없었다. 우리는 다행히 은행이라서 큰 문제가 없지만.”

—원인은?

“미국의 통화긴축 기조를 따라 한국도 금리를 올리면서 채권시장의 가산금리가 올라가고 있다. 그래서 기업들의 차입 환경이 안좋아지고 있다.

지금처럼 자금이 돌지 않는 신용 경색 현상이 발생하면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추고 유동성(자금)을 공급하면서 해결해야 하는데, 인플레이션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상황이 심각하다.”

유 본부장이 여기서 한국전력 이야기를 꺼냈다.

신용도가 매우 높은 한국전력이 채권을 무더기로 발행하면서 다른 기업들이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고 채권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전남 나주의 한전 본사./한국전력

“한전이 채권을 너무 많이 발행해 최근 한전채도 입찰에 성공하지 못했다. 한전은 한국을 대표하는 공기업으로 신용등급이 매우 높다. 이렇게 높은 신용등급의 채권이 계속 나오자 시장이 이것을 우선적으로 소화한다. 그러다 보니 신용등급이 낮은 채권을 사주기 어려웠다.”

기업 투자 줄어들 듯

—2~3주 지난 지금의 상황은?

“그때 보다는 나아졌다. 그러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무슨 뜻인가?

“높아진 신용 스프레드가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 또 시장의 거래량도 평상시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채권 판매가 잘 안되고 있다.”

기업들이 채권 발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향후 시설 투자가 어려울 전망이다. 사진은 최근 시설 확장을 발표한 한 정유사 공장./조선일보 DB

—영향은?

“채권 발행이 안되니 기업들이 투자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금시장 경색이 9월말부터 시작돼 벌써 한달이 넘었다. 기업들의 투자 축소 현상이 실제로 나타나고 있을 것이다.”

자금경색의 해법

—해결 방법은?

“한국 경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충분한 능력이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자금시장 경색은 우리 금융시스템에 자금이 모자라서 생기는 현상이다. 이 자금을 충당해주면 된다.”

—은행이 돈을 빌려주면 될 것 아닌가?

“은행이 돈을 빌려주려면 두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첫째, 은행이 돈을 갖고 있어야 한다. 둘째, 충분한 자기 자본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기업에 돈을 빌려줬다가 못 받아도 자기 자본으로 예금자에게는 돈을 돌려 줄 수 있어야 한다. 전문 용어로 금융회사의 자본 건전성이라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 은행이 돈을 충분히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돈을 채권 매입에 사용해도 은행의 자본 건전성에 문제가 없어야 시중의 자금 경색 현상이 해소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은행은 유동성은 갖고 있지만, 자본 건전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자금을 무한히 공급할 수는 없다.”

시중 은행들이 기업들의 채권을 사들이면 회사들의 자금난이 해소될 수 있다. 하지만 은행들은 재무 건전성 기준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채권 매입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김광수 은행연합회 회장이 지난 11월 9일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은행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뉴시스

—은행 외에 다른 금융회사들은?

“은행을 제외하고 다른 금융회사들의 유동성이 여유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보험사는 보험가입자들이 내는 보험료 수입이 꾸준히 들어오므로 유동성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 보험사 현금수지를 보면 보험료 수입보다 보험금 지급액이 더 많은 것 같다. 사람들이 요즘 보험을 안들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살기가 어려워 보험을 해약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신전문회사도 유동성 상황이 과거만큼 좋지 않다.”

해외 투자했던 자금 들여와야

—그렇다면 해결책은?

“자본 건전성 비율, 다시 말해 자본 확충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돈이 시중에 들어와 채권을 사주면 된다.”

—중앙은행은 자본 건전성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지 않나?

“그렇다. 하지만 지금 인플레이션 때문에 시중 통화를 흡수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중앙은행이 돈을 더 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시중의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한국은행이 직접 시중 채권을 매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통화량이 늘어나고 물가가 상승하기 때문에 물가상승률이 높은 지금 같은 시기에는 선택하기 어려운 정책이다.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위치한 한국은행 건물./이명원 기자

—대안은?

“우리나라의 순대외자산이 7000억달러 정도 된다. 이 돈이 어디서 생겼을까? 그동안 경상수지 흑자가 나면서 생긴 돈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2~3년간의 통계를 보면 경상수지 흑자액보다 해외자산 증가액이 더 크다. 국내로 들어온 달러보다 더 많은 달러가 해외로 나갔다는 뜻이다. 국내 기업이나 민간인이 자기 돈을 해외로 가져갔을 수도 있고, 남의 돈을 빌려서 나갔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작년과 재작년에 서학개미들 중에는 자기 돈으로 투자한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는 대출을 받아서 해외 주식에 투자했을 것이다. 이렇게 국내 부채로 자금을 조달한 대외자산 증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해외 투자금을 환수하면 된다. 이 자금들은 자기자본 비율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자금이다. 또한 국내 부채로 조달한 해외자산을 정리하면, 국내부채 잔액도 같이 감소할 수 있다. 이 돈이 들어와서 국내 자본시장에 투입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벌써 시작된 것 같다.”

애플이나 아마존 등 해외 주식 구입을 위해 유출된 자금이 다시 국내로 돌아와 회사채를 매입하는 것도 자금난 해소의 한 방법으로 거론된다. 사진은 애플의 아이폰./애플

—어떻게 알 수 있나?

“한국은행의 9월 경상수지표를 보면 9월에 해외주식 투자가 전월 대비 5억달러 줄었다. 이렇게 해외에 투자된 자금이 국내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회사채 시장이 빨리 안정될 것이다. 자금이 늦게 들어오면 안정도 그만큼 늦어진다.

팀원들과 회의를 할 때마다 문제가 작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가 이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과 능력은 있다고 항상 이야기한다. 정부도 한두달 전까지는 문제를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문제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대책을 집행하는 단계까지 간 것 같다.”

연기금 국내 투자 늘려야

—서학개미들을 국내로 돌아오게 하려면?

“인센티브(유인)를 줘야 한다. 경제부처 공무원들이 경험이 많고 스마트하니 좋은 방안을 만들어낼 것이라 믿는다. 특히 해외투자의 큰 몫을 차지하는 곳은 연기금들이다. 연기금들의 국내외 투자 비중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해외투자 자금이 국내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연기금들이 국내 비중을 늘려도 우량채권만 살 것 아닌가? 금융경색이 해소될까?

“지금은 우량 기업들도 채권 발행이 안되고 있다. 카드회사나 여신전문회사 조차 채권 발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들이 우량기업이 아니어서 발행이 어렵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나?

이런 회사들의 자금경색이 풀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시장의 기능에 의해 그 아래 신용등급의 채권 가격이 자연스레 결정될 것이다. 어차피 한계기업은 시장의 기능에 따라 자연스레 퇴출된다.”

자금난 해소를 위한 또 다른 방법은 '큰 손' 투자자인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 비중을 줄이고 국내 투자 비중을 늘리는 것이다. 전북 전주의 국민연금공단 건물./뉴스1

—채권시장이 아예 마비된 정도인가?

“마비는 전혀 작동을 안하다는 뜻인데, 그건 아니다. 물론 한계 기업들은 그렇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회사들이 전반적으로 자금을 조달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다고 봐야 한다.”

유 본부장이 ‘큰 어려움’ 네 글자를 말할 때 오른 손을 들며 목청을 아주 높였다. 대화가 한·미간 기준금리 격차와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 등 개별 이슈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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