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신한, 하나 등 주요 금융지주들의 주가가 20% 넘게 치솟은 이유는 행동주의 사모펀드인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이 행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얼라인파트너스는 지난 2일 KB금융 등 7곳의 금융지주에 “주주 환원을 당기순이익의 50% 이상으로 확대하라”는 공개 서한을 보냈다. 배당을 늘리라고 요구한 것이다. 같은 날 신한금융지주가 주주 환원 확대 방침을 밝히면서 투자자들의 기대감은 커졌다. 금융투자 업계에서는 “다른 금융지주들도 오는 3월 주주총회를 앞두고 압박을 느끼고 있을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최근 회사 경영에 개입해 기업 가치를 높이는 행동주의 펀드들의 요구가 실제 기업 경영에 반영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 동학개미운동으로 불린 주식 투자 열풍으로 국내 개인 투자자 수가 1400만명 가까이 늘어난 것이 행동주의 펀드의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다. 이들 펀드는 소액주주의 대변인을 자처하며 대주주의 전횡을 견제하고, 지배 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등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계열사 간 유상증자 저지, 사외이사 비율 확대까지
작년 12월 행동주의 펀드인 트러스톤자산운용은 태광산업이 계열사인 흥국생명 유상증자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해 무산시켰다. 당시 태광그룹 대주주 일가가 소유한 흥국생명은 유동성 리스크를 겪고 있었는데, 계열사 등으로부터 4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받아 건전성 위기를 탈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열사이긴 하지만 흥국생명 주식을 1주도 보유하지 않은 태광산업이 흥국생명을 지원하는 것은 태광산업 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배임 행위라고 트러스톤 측이 강하게 문제 제기하자 태광산업은 유상증자 참여를 전격 철회했다. 유상증자 참여가 공식적으로 무산된 작년 12월 15일 태광산업 주가는 2.6% 상승했는데, 이는 약 6개월 만에 하루 최대 폭 상승이었다.
행동주의 펀드는 대기업 계열사 간의 거래뿐 아니라 회사의 분할 같은 경영 판단에도 목소리를 낸다. 지난 15일 연예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는 사외이사 비율을 현행 25%에서 과반수인 57%로 확대하는 등의 경영 구조 개선안을 발표했는데, 이는 작년 얼라인파트너스가 SM에 공개 요구한 사항 중 일부였다. 당시 얼라인 측은 “SM 대주주인 이수만 회장의 입김을 견제할 장치가 필요하다”며 이같이 요구했다. 또 작년 10월엔 역시 행동주의 성향인 플래쉬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가 KT&G에 “자회사인 한국인삼공사를 분리 상장해 인삼 브랜드 가치를 극대화하라”는 주주 제안을 하기도 했다.
◇‘기업사냥꾼’에서 ‘호재 제조기’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행동주의 펀드는 국내 시장에서 ‘기업 사냥꾼’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다. 과거 소버린자산운용이나 엘리엇매니지먼트 같은 외국계 헤지펀드가 국내 대기업들을 공격하면서 “너무 단기적인 이익만 추구한다”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엔 코로나 특수를 타고 급증한 개인 투자자들이 행동주의 펀드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해주면서 외국계가 아닌 토종 행동주의 펀드들이 약진하고 있다. 얼라인파트너스의 이창환 대표는 “기업 가치에 민감한 개인 투자자들이 많아지면서 행동주의 펀드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행동주의 펀드가 보유한 지분 이상으로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할 위험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펀드들이 불과 1~5% 정도의 회사 지분을 가지고 주주 여론을 등에 업은 채 회사의 고유한 경영 판단 영역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각종 이슈를 만들어 주가를 띄우면 단기적으로 펀드의 수익률은 높아지겠지만, 회사의 장기적인 경영 계획을 틀어놓게 된다는 비판도 있다.
이상호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 사항의 적절성은 따져봐야 한다”면서도 “그간 대주주와 경영진 위주로 굴러가던 회사의 의사 결정 과정에 ‘신선한 목소리’가 등장했고, 그것이 글로벌 스탠더드 관점에서 회사의 가치를 높이자는 전문 펀드의 의견이기 때문에 주주들이 환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