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에 있는 일신방직의 본사 사무실. 이 회사 소액주주 단체 대표단 5명과 경영관리 담당 임직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책상에 마주 앉았다. 주주들은 “주가 부양을 위해 최소한 450억원어치 자사주를 매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회사 측은 “주주 환원은 동의하지만, 금액이 너무 크다”고 맞섰다. 이 회사 지분 3.4%를 보유한 이 단체 회원들이 이달 초 ‘회사가 최근 공장 매각으로 벌어들인 현금 약 3200억원 중 상당량을 주주를 위해 써야 한다’는 취지의 주주제안을 보낸 뒤 열린 간담회였다. 회의는 1시간 넘도록 계속됐고, 열띤 논쟁이 이어졌다.
일주일 뒤인 지난 20일 일신방직 이사회는 “주주 환원을 위해 200억원의 자사주를 매입한다”고 발표했다. 주주단체가 거래 활성화를 위해 추가로 요구한 주식 액면분할도 수용한다고 밝혔다. 주주단체 대표인 서일원씨는 “당초 목표 금액(450억원)엔 미치지 못하지만, 회사가 주주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이날 회사 주가는 하루 만에 약 11% 뛰었다. 금융투자업계에선 “소액주주들이 뭉쳐 주주 환원을 관철시킨 성공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선수’가 아닌 ‘일반인’ 주주들의 반란
최근 회사 경영 개입으로 주주 가치를 상승시키려는 행동주의 펀드들이 ‘SM엔터테인먼트 경영권 분쟁’ 등 굵직한 이슈를 이끌며 국내 자본시장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가운데 전문 펀드가 아닌 일반 소액주주들도 “주주로서 내 권리를 인정해 달라”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행동주의 펀드가 외국계 사모펀드 출신 전문가가 이끄는 ‘선수’라면, ‘행동주의 개미’는 그야말로 ‘일반인’이다. 그간 대주주와 주요 기관 투자자들에 밀려 발언권이 거의 없었는데, 최근 장안의 화제인 행동주의 흐름을 타고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의약품 제조업체인 신풍제약의 소액주주 700여 명도 지난 9일 회사 측에 “자사주를 소각하라”는 주주제안을 발송했다. 신풍제약은 지난 2020년 채무 변제를 위해 블록딜로 자사주 약 129만주를 2154억원에 매각했다. 소액주주들은 주주제안에서 “자사주 매각으로 주가가 폭락했고, 소액주주의 재산권 침해가 발생했다”며 “당시 매각 수량과 동일한 규모(129만주)로 자사주를 소각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또 주주들에게 요구 사항을 전파하기 위해 사측에 작년 말 기준 주주명부의 열람을 청구하기도 했다.
일부 소액주주들은 회사와 법정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22일 손경준씨를 비롯한 한국철강의 소액주주들은 법원에 “곧 열릴 주주총회에 ‘회사의 1000억원 자사주 매입’ 안건을 상정해 달라”는 취지의 가처분 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이들은 지난 7일 회사에 자사주 매입, 현금배당 확대 등 주주환원책을 요구하는 내용의 주주제안을 제출했다. 그런데 회사는 자사주 매입에 대해 “이사회 결정 사안”이라며 주총 상정을 거부했다. 그러자 주주들이 이에 불복하는 소송을 내는 것이다.
◇전문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구조지만… 협상으로 결실”
자본시장 전문가들은 최근 ‘행동주의 개미’에 대해 “전문 펀드의 행동주의보다 더 어려운 길”이라고 입을 모은다. 통상 행동주의 펀드들은 경영권 장악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이른바 ‘주인 없는 회사’나 대주주 지분율이 그다지 높지 않은 회사를 타깃으로 삼는다. 최대주주 지분율이 압도적인 경우 아무리 소액주주 표를 끌어모으더라도 주총 표대결에서 이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얼라인파트너스의 목표였던 SM엔터테인먼트도 최대주주인 이수만 전 총괄프로듀서의 지분은 18%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장기 투자자가 주를 이루는 ‘행동주의 개미’들의 상대는 대부분 대주주 지분율이 높은 회사다. 일신방직이나 한국철강도 최대주주(특수관계인 포함) 지분율이 50%대다. 주총에서 이기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액주주들이 실질적인 협상보다는 ‘이목 끌기’를 위해 비현실적이거나 과격한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김우진 서울대 교수는 “소액주주 권리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국내 시장에서, 회사 측과의 협상으로 성과를 얻어내는 주주 단체들이 나오는 것은 주주자본주의 차원에서 고무적”이라면서도 “부실기업의 주가를 띄우기 위한 목적으로 과격한 단체 행동을 하는 소액주주 단체들도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