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천상업중학교(현 인천고 당시 6년제) 4학년생이던 1950년 12월 4일, 학도병으로 군대에 차출됐다. 고작 만 17세 나이에 불과했다. 당시 아군은 전쟁 발발 3개월 만에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갔다가 갑작스러운 중공(현 중국)군 개입에 거의 모든 전선에서 패퇴하고 있었다. 화급을 다투는 전시 상황이라는 이유로 ‘입대한다’는 기별을 가족에게 전할 새도 없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전장에 나서야 했으므로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려면 총을 들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참전하던 때였다. 자식의 귀가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부모님을 생각하니 목이 메어왔지만, 한 떼의 젊은이들 틈에 파묻혀 입영 화차(화물열차)에 몸을 실었다.
대구 신병훈련소에서 2주간 총 다루는 법 등 짧은 군사 훈련을 받고 곧바로 춘천중동부전선에 투입됐다. 내가 속한 부대는 네 번이나 적에게 포위를 당해 죽을 뻔한 고비를 가까스로 넘겼다. 함께 싸우다 비명에 스러져 간 전우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잠 못 이룰 때가 많다.
10개월간 강원도 안흥리, 포동리, 원통리, 서화면 등지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수없이 치르며 전쟁의 참혹함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부상에 고통스러워 하던 전우들의 신음 소리, 피와 사체 썩는 냄새가 뒤섞여 진동하던 전장, 잿더미가 돼 버린 마을과 그 위를 뒹굴던 민간인 주검들의 기억이 또렷하다.
나 역시도 ‘이대로 죽고 마는구나’ 싶어 삶을 체념했던 순간이 여러 번이었다. 중공군의 포위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얼음 낀 강으로 이동하다가 빠져서 동사 위기를 맞았고, 차량에 실어야 할 81mm 박격포탄 6발을 군장과 함께 짊어지고 강행군하다 혼절해 버려질 뻔하기도 했다. 추위·허기·공포에 떨며 ‘죽음이 이보다 고통스러울까’라는 생각에 잠시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기도 했다. 지옥보다 참혹하며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전쟁이었다.
운 좋게도 죽을 고비들을 모두 넘겼다. 1951년 8월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전투 중에 눈과 두 손, 무릎 부위에 파편상을 입고 원주 야전병원으로 후송됐다가 대구 육군병원을 거쳐 그해 9월 제대할 수 있었다.
사지(死地)로부터 생환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두려움 없이 살아갈 용기가 생겼다. 매 순간 감사하고 배우며 어떠한 역경에도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의미 있게 살자고 다짐하게 됐다.
1957년 대학(서울 상대) 졸업 후 건설사(대림산업)에 입사했고, 2년 뒤 계열사인 서울증권으로 옮겨 10년도 안 돼 부장까지 승진했다. 1971년 퇴사 후 14년간 거의 쓰지 않고 모은 월급 500여 만원에 지인들 돈을 보태 3500만원을 마련했다. 그 돈으로 38세에 신영증권을 인수했다. 자본시장 제도가 미비했고, 증시가 불안했지만 1968년 ‘자본시장육성에관한법률’이 제정돼 기회가 올 걸로 봤다.
1956년 설립된 신영증권은 네 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등 위기 상황이었다. 그래서 회삿돈을 아끼기 위해 자가용 승용차를 업무에 썼다. 10년간 고객들을 접대할 유자·모과차를 집에서 담가와 접대비도 절약했다. 불법적 방법에 의한 수익 창출이나 위험한 투자는 피했다.
그 결과 만성 적자였던 회사는 인수 후 지난해까지 52년 연속 흑자를 달성했다. 2004년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으로부터 투자를 받기도 했다.
물려받은 재산 한 푼도 없던 젊은 나이에 회사를 인수해 지금 수준까지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6·25 전쟁에서 살아남은 경험 때문이었다. 전쟁의 참상과 슬픔을 목격했기에 ‘다시는 6·25와 같은 비극이 재발해선 안 된다’라는 신념이 생겼고 자손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반드시 마칠 것을 권유했다. 장남 원종석 현 신영증권 회장은 물론, 장손자도 대학 재학 중 현역 복무를 마쳤다.
직계 3대가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결과, 지난 2020년 병무청으로부터 병역 명문가로 선정되는 영광도 얻었다. 모든 국민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국방의 의무를 당연히 지킨 것에 불과해 과분한 처사였지만, 좋은 뜻을 널리 알리자는 차원에서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2017년부터 매년 미국의 현충일인 메모리얼 데이, 6·25 전쟁일 등 주요 기념일마다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 내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에 무명(無名) 화환을 보내고 있다. 아무 연고 없는 타국에서 피를 흘린 전우들에게 감사하고, 고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서다. 올해도 어김없이 화환을 보냈다. 이름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는 대신 ‘당신 곁에서 싸웠던 한 한국 군인으로부터(From a fellow Korean soldier who fought alongside you)’라고만 적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전우들이 없었다면 지금 한국은 어떻게 돼 있었을까.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전적으로 그들의 헌신과 희생 때문이었음을 6·25 즈음에 다시 한번 떠올린다.
원국희 신영증권 창업주는…
원국희(90) 신영증권 창업주는 외부에 드러나는 것을 경계하고 회사 경영에만 몰두했다. 신영증권을 인수한 1971년부터 지금까지 50년 넘게 단 한 번도 언론 인터뷰를 한 적이 없을 정도다.
1933년 경기 부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근검절약과 내실 경영을 강조했다. 대형화를 거부하고 작지만 강한 증권사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1980년대 한 대기업이 자본금을 200억원 늘려주겠다며 투자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구순이 넘은 지금도 1㎞ 안팎의 거리는 항상 걸어서 이동한다.
신영증권이란 사명은 ‘신즉근영(信卽根榮·고객 신뢰가 곧 회사 번영의 근간)’에서 따왔다. 그렇게 고객과 회사 경영에만 집중한 결과, 만년 적자였던 회사는 인수 후 52년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원 전 회장은 신영증권 인수 후 46년간 맡았던 등기임원직을 2017년 내려놨다. 현재는 아들 원종석 회장과 황성엽 사장이 각자 대표로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