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부진과 부동산 시장 침체로 세수(稅收) 부족에 시달리는 정부가 올해 들어서만 한국은행에서 100조원 넘는 돈을 급히 빌려다 쓴 것으로 나타났다. 주로 비상시에 써야 할 한은 자금에 정부가 쉽게 손을 벌리면서 국가 재정 관리의 계획성과 투명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상황실 서울상황센터에서 열린 새만금 잼버리 비상대책반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뉴스1

14일 더불어민주당 양경숙 의원실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1~7월 ‘대(對)정부 일시대출’을 통해 한은으로부터 100조8000억원(누적 기준)을 빌렸다. 대정부 일시대출은 정부가 세입과 지출 사이에 시차가 생길 때 일시적 자금 부족을 메우기 위해 한은에서 대출받는 것이다. 국고금 관리법, 한국은행법 등에 근거가 있다. 개인이 은행에서 필요할 때 쓰고 수시로 갚는 ‘마이너스 통장(신용한도 대출)’과 비슷하다. 정부는 한 해 50조원 한도로 한은에 빌렸다가 갚기를 반복하는데, 100조8000억원은 상환액을 제외하고 단순하게 빌린 것만 누적해서 따진 것이다.

이는 해당 통계가 전산화된 2010년 이래 1~7월 기준으로 대출액이 가장 많았다. 지난해 전체 대출액(34조2000억원)의 3배에 가까웠고, 코로나 사태로 재정을 대거 투입했던 2020년 1~7월(90조5000억원)보다도 10조원쯤 많다. 한편 정부는 지난달 말 기준으로는 대출금을 모두 갚은 상태다. 다만, 올해 지출한 이자 비용만 1141억원에 달한다.

올 들어 정부가 ‘한은 마이너스통장’을 자주 이용한 것은 수출 침체와 내수 부진 등으로 쓸 곳(세출)에 비해 걷힌 세금(세입)이 적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총수입에서 총지출을 뺀 통합재정수지는 지난 6월 말 기준 55조4000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정부는 올해 연간 세수 규모를 356조원 정도로 추산하고 있는데 이는 지난해 예상한 규모(400조5000억원)보다 44조원가량 적은 것이다.

하지만 당장 세수가 부족하다고 한은 자금에 기대는 건 바람직한 재정 관리 준칙으로 볼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세수가 부족하면 국채를 발행하거나 증세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국가 재정 투명성과 계획적 관리 측면에 있어서도 일시대출 남발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확대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일시대출 제도는 매달 세입, 지출 여건을 살펴보면서 국회가 허용한 범위에서 재정 운용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기 위해 시행하는 것인만큼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