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와 경기 둔화로 가계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카드 빚과 신용카드 대금 결제를 뒤로 미루는 서민들이 급증하고 있다. 카드 결제액을 일부만 갚고 뒤로 미루는 리볼빙(결제액 이월 약정)과 기존 대출을 갚기 위해 대출을 받은 대환대출 잔액은 9조1000억원을 돌파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고금리가 길어질 경우, ‘빚 폭탄’이 터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달 서울 충구 충무로역 인근에 붙은 카드대출 관련 광고물./뉴시스

24일 여신금융협회 등에 따르면, 지난달 신한·삼성·현대·KB국민·롯데·하나·우리·BC 등 국내 전업 카드사 8곳의 리볼빙(결제액 이월 약정) 잔액은 7조5115억원을 기록했다. 전월(7조4697억원)보다 418억원 불어난 것으로 2021년 11월 리볼빙 관련 공시를 시작한 이래 최고치다. 리볼빙 잔액은 지난 9월 역대 처음 7조5000억원을 넘은 이후 증가세가 주춤했다가 다시 지난달 증가했다.

리볼빙은 카드 대금의 최소 10% 정도만 우선 갚고 나머지는 다음 달로 넘겨 갚을 수 있게 하는 서비스다. 카드 대금을 갚기 어려운 이용자들이 급하게 연체를 막기 위한 용도로 쓴다. 리볼빙 서비스를 이용하면 카드 대금을 한 번에 결제하는 부담을 덜 수 있지만, 수수료율이 평균 연 17~18%에 달해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리볼빙뿐 아니라 카드론을 쓰는 사람들이 기존에 빌린 카드 빚이 밀려 다시 대출받는 ‘카드론 대환 대출’ 잔액도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달 카드론 대환 대출 잔액은 1조5960억원으로 한 달 전보다 1000억원 넘게 늘었다. 지난해 말(1조461억원)과 비교하면 5500억원가량 불어난 것이다.

그래픽=김하경

리볼빙과 카드론 대환 대출은 서민 경제가 팍팍해질수록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올해 유독 급증한 배경으로는 은행과 저축은행, 대부업체 등이 중·저신용자 대상 신용 대출을 조이고 있는 점이 꼽힌다. 은행과 저축은행은 각각 연체율 상승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등으로 건전성 관리를 위해 신용 대출 심사를 깐깐하게 하고 있다. 대부업체도 법정 최고 금리(연 20%)가 너무 낮아 수익을 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신용 대출 영업을 사실상 중단한 상태다. 카드업계 관계자는 “카드사가 서민들의 유일한 ‘급전(急錢) 창구’ 역할을 하면서 올해 대출 규모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서민들이 리볼빙과 대환 대출 등으로 계속 ‘빚 돌려막기’를 할 경우, 시장에 막대한 부담이 될 수 있는 만큼 금융 당국은 관련 대출 증가세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최근 “무분별한 리볼빙 사용은 급격한 빚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상환 능력이 개선되면 리볼빙 잔액을 선결제하거나 결제 비율을 올려 리볼빙 잔액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불황형 대출’로 불리는 보험계약대출(약관대출) 증가세도 심상치 않다. 약관대출은 보험을 유지하면서 보험 해약 환급금의 50~95% 한도로 돈을 빌리는 것이다. 지난 3분기 기준 약관대출 규모는 70조원으로 2분기보다 1조1000억원 증가했다. 지난해 3분기와 비교하면 4조2000억원이나 늘었다. 약관대출로도 돈이 부족해 손해를 감수하고 보험을 해약하는 사례도 최근 크게 늘었다. 생명보험협회에 따르면 지난 9월 기준 생명보험사들의 해약·효력상실 환급금은 35조6682억원으로 지난해(30조6531억원)보다 5조151억원(16.4%) 증가했다.

보험 관련 서민들의 애로가 커지자 보험업계는 은행권처럼 민생 금융 지원 방안을 내놓고 있다. 보험업계는 최근 자동차 보험료를 낮추고, 실손의료보험료 인상 폭을 축소한 데 이어 약관대출 가산금리를 낮추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실직·폐업·중대질병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계약자에 대해 약관대출 이자 납부를 유예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