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계 행동주의 펀드인 팰리서 캐피털은 작년 10월부터 자신들이 투자한 일본 케이세이 철도를 압박하고 있다. 케이세이가 보유한 도쿄 디즈니랜드 운영회사(오리엔탈랜드) 지분 22% 중 일부를 팔아 철도 사업에 재투자하라는 것이다. 싱가포르에 있는 헤지펀드 ‘3D 인베스트먼트 파트너스’는 일본 주류 업체 삿포로홀딩스에 대해 “미활용 부동산을 매각해 유동성(자금)을 확보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일본 증시가 9일과 10일 이틀 연속으로 34년 만의 최고치를 갈아치운 배경에는 저평가된 일본 기업들을 노리는 행동주의 펀드와 적극적인 주주 환원 정책을 독려하는 일본 정부의 노력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0일 닛케이평균은 전날보다 2.01% 오른 3만4441.72엔으로 거래를 마치며 1990년 3월 9일(3만3993.99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주주 환원 정책 방아쇠 당긴 행동주의 펀드
행동주의란 배당 확대나 자사주 매입, 경영진 교체 등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해 주가를 올려 이익을 얻는 투자 방식을 뜻한다. 기업들은 각종 요구에 홍역을 치르지만, 주주들로서는 주가 상승의 과실을 누리는 것이다. 10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글로벌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배당 확대 등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주주 제안 건수는 2020년 27건에서 지난해 6월 67건으로 두 배 넘게 급증했다. 행동주의 펀드들이 일본 기업들을 타깃으로 주주 환원 정책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일본 금융 당국도 호응에 나섰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지난해 4월 상장사 3300여 곳에 공문을 보내 “주가순자산비율(PBR)이 1배를 밑도는 경우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한 구체 방안을 공시하고 실행해 달라”고 주문했다. 고질적인 일본 증시의 저평가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였다. “주가가 청산 가치에도 못 미치는 PBR 1배 미만 상태가 계속되면 2026년에 상장 폐지 목록에 오를 수 있다”는 경고도 곁들였다. PBR은 주가를 주당 순자산으로 나눈 수치로, 1 미만이면 현재 주가가 장부상 가치에도 못 미칠 정도로 저평가돼있다는 뜻이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작년 7월 지배구조 우량 기업 150개 종목을 따로 뽑아 ‘JPX 프라임 150′이라는 별도 지수를 만들었다. 이 지수에 포함되면 주가가 오를 것으로 기대하는 기업들이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주주 친화적인 노력을 하게끔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도요타 등 169사가 지난해 만년 저평가 탈출
행동주의 펀드와 금융 당국의 공세가 강화되자 일본 기업들은 배당 확대나 자사주 매입을 통한 주가 높이기에 나섰다. 작년 11월 미쓰비시UFJ금융그룹과 스미토모 미쓰이 금융그룹은 각각 3조4000억원, 1조30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하겠다고 밝혔다. 배당도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닛케이에 따르면, 3월 결산 일본 상장기업 2350여 개의 올해 배당액은 역대 최대 규모인 15조7000억엔(약 144조11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주주 이익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만년 저평가를 탈출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본 대표 기업인 도요타자동차의 PBR이 지난해 1배를 돌파한 것이 대표적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이 도쿄증시에 상장된 1800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2022년 말 PBR이 1배 미만이었던 기업 169사가 현재 1배 이상을 회복한 것으로 집계됐다. PBR 1배 미만인 기업의 비율도 같은 기간 51%에서 44%로 떨어졌다.
일본 증시 전망은 올해도 밝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미·중 갈등 등 국제 정치 환경과 거시 경제 상황이 일본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행의 완화적 통화 정책이 지속되며, 엔화 약세로 가격 경쟁력이 생긴 일본 수출 기업들의 실적도 개선되고 있다.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 대만 TSMC는 일본 소니·덴소와 합작법인 JASM을 세우고, 구마모토현 공장에서 올해 말부터 양산을 시작한다. 이 효과가 60조원에 달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강철구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는 “일본 기업의 설비 투자는 작년 역대 최고였고, 현재 건설 중인 반도체 공장 등이 가동에 들어가면 경제는 더 호황이 될 수밖에 없다”며 “일본 증시는 올해도 오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