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박상훈

지난달 17일 정부가 만년 저평가된 국내 주가를 올리기 위한 정책을 내놓겠다고 밝힌 후 국내 증시가 뜨거워지고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가 해소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외국인 투자자들이 5조원 넘게 순매수(매수가 매도보다 많은 것)한 것이다.

특히 주가순자산비율(PBR)이 1배 미만인 저평가주를 중심으로 크게 뛰었다. PBR은 주식의 장부상 가치(순자산)와 비교한 시장 가치(주가·시가총액)를 뜻한다. 이 수치가 1보다 낮으면 회사의 시장가치가 장부상 가치만큼도 안 될 정도로 저평가됐다고 본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달 17일부터 지난 8일까지 KRX주가지수 17개 중 보험이 27%로 가장 많이 올랐고, 은행(20%), 자동차(17%), 증권(15%) 등 대표 저PBR 업종들이 뒤를 이었다. 같은 기간 코스피 상승률(4.9%)을 3~5배 웃돈 것이다.

이 같은 분위기는 2021년부터 증시에서 존재감이 커진 행동주의 영향도 큰 것으로 해석된다. 행동주의란 펀드 같은 전문 투자가가 기업에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경영진 교체 등 주주권을 적극 요구해 주가를 올린 뒤 이익을 얻는 투자 방식이다. 기업들은 각종 요구에 홍역을 치르지만, 주주들로서는 주가 상승의 과실을 누리는 것이다.

◇작년 행동주의 대상 韓기업 73사 ‘세계 4위’

12일 영국의 글로벌 기업 거버넌스(지배구조) 조사 업체 딜리전트 마켓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작년 한국에서는 73개 기업을 대상으로 총 91개의 주주 행동주의 요청이 발생했다. 이는 미국·일본·캐나다에 이어 넷째로 많은 수준이다. 주주총회가 몰린 상반기만 봤을 때 한국은 작년 미국·일본에 이어 주주 행동주의가 일어난 기업이 셋째로 많았다.

통상 주주 행동주의 활동은 미국·캐나다·영국·호주 등 서구권 국가에서 상대적으로 활발했다. 그런데 2019년 이후 일본, 2021년 이후 한국에서도 행동주의가 뚜렷하게 증가하고 있다. 2020년 한국에서 행동주의 대상 기업은 10개에 불과했지만 2021년에는 27개, 2022년에는 49개, 작년 73개로 매년 두 배 안팎의 증가세를 보였다.

그래픽=박상훈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2016년 스튜어드십코드(국민연금 등의 수탁자 책임 원칙) 도입과 2020년 감사위원을 분리 선출하고 최대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상법 개정 등이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올해에도 정기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주주 행동주의는 저PBR주 상승 흐름과 맞물려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외국인, 저PBR주 중심 5조원 순매수

주주 친화적 정책이 시행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외국인들이 밀려 들어오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기업들이 스스로 가치를 높이는 제도를 운용해보려 한다”고 밝힌 지난달 17일 이후 지난 8일까지 17거래일 동안 외국인은 국내 증시에서 5조5000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특히 코스피200 기업을 지난달 19일부터 지난 8일까지 15거래일 연속 순매수했다. 외국인이 15일 이상 연속으로 코스피200 기업을 사들인 것은 2022년 9월 29일~10월 27일(19일) 이후 1년 2개월여 만이다.

외국인의 매수세는 현대차(1조2020억원), 기아(4920억원), 삼성물산(3040억원), KB금융(2340억원), 하나금융(2290억원) 등 저PBR 종목에 집중됐다. 외국인 상위 10종목 중 저PBR 종목이 절반을 차지했다. 현대차 순매수액은 코스피 전체 외국인 순매수액의 4분의 1에 달했다.

그래픽=박상훈

◇저PBR주 옥석 가리려면…행동주의 주목

전문가들은 저PBR주 쏠림 현상은 당분간 더 지속될 가능이 있다고 본다. 정부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적용 대상에 코스피 종목뿐만 아니라 코스닥까지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금융위가 기업의 인적분할 시 자사주 신주 배정 금지를 추진하기로 하는 등 자사주 제도 개선 방침을 밝혔고, 기업들은 선제적으로 자사주 매입과 소각을 진행하거나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저PBR주라고 모두 오르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행동주의 투자자들 움직임을 잘 참조할 것을 조언한다. 그들이 대상으로 삼은 기업의 가치가 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우리나라보다 먼저 기업 가치 제고를 정부 차원에서 추진한 일본에서도 정책이 본격화한 후 행동주의 펀드들의 활동량이 크게 확대됐다. 작년 행동주의 펀드의 대상이 된 일본 기업의 총시가총액은 2520억달러로, 전년 1170억달러에 비해 2.2배 증가했다. 그만큼 기업 가치가 커졌다는 뜻이다.

☞PBR(주가순자산비율)

Price Book-value Ratio의 약자로 주가를 주당 순자산 가치로 나눈 것이다. PBR이 1 미만이라는 것은 것은 회사의 시장가치(시가총액)가 장부상 가치(순자산)만큼도 인정받지 못할 정도로 저평가됐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