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세계 주요국 증시가 연일 최고점을 찍고 있다. 반면 서울 증시는 국내 투자자들의 ‘국장(國場·서울 증시) 탈출’ 탓에 박스권 장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올 초 상장 기업의 주주 환원 강화를 골자로 하는 ‘코리아 밸류업(기업 가치 제고)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한국거래소가 주주 환원 강화 목표와 추진 일정을 공시하게 하는 가이드 라인을 발표하고, 정부는 밸류업 참가 기업에 대해 법인세, 배당소득세 감면 등의 세제 지원안을 내놨다. 하지만 당근도 채찍도 약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밸류업 지휘자 중 한 명인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을 만나 밸류업 프로그램 진행 상황, 외국 투자자들의 반응, 기대 효과 등을 물었다.
-코리아 밸류업 정책 내용이 약하다는 지적이 많다. 일본처럼 밸류업 효과가 나타날까.
“일본 증시의 성공 요인은 크게 3가지다. 첫째, 잃어버린 30년을 보내면서 기업들이 구조 조정을 많이 했다. 예를 들어 디지털카메라 탓에 필름이 필요 없어지자 후지필름은 화학 기업으로 변모해 수익성 높은 기업으로 거듭났다. 둘째, 일본 기업들이 미·중 경제 갈등 수혜를 봤다. 자본시장 측면에선 중국에 투자됐던 국제 자본들이 일본, 인도로 재배분됐다. 셋째가 증권거래소의 밸류업 정책이다.”
-일본 밸류업 정책의 핵심 내용은 뭔가.
“증권거래소가 2023년에 ‘자본 비용과 주가를 의식한 경영 실현을 위한 대응’이란 제목으로 밸류업 정책을 본격 가동했다. 도쿄 거래소와 오사카 거래소가 통합하고 프라임·스탠더드·그로스라는 3개 시장으로 재편했다. 프라임과 스탠더드에 상장된 기업은 자본 비용과 주가를 감안한 경영을 하도록 유도했다.”
-일본에 비해 당근과 채찍이 약하다는 비판이 있다.
“그렇지 않다. 일본은 세제 인센티브가 없고, 상장 기업 퇴출 같은 페널티도 없다. 일본 주요 상장 기업들은 대주주가 없고 연기금, 은행이 주인이다. 그런 면에서 거래소가 상장 기업의 협조를 받기가 한국보단 수월하다. 한국과 일본이 비슷한 점은 마켓 프레셔(시장 압력), 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동료 집단의 압력)가 잘 작동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삼성이 하는데 SK가 안 하고 무시하긴 어렵다. A기업은 주주 친화를 강화해서 언론의 우호적 평가를 받는데 B기업은 무시하고 안 한다? 한국 기업들은 체면을 중시하기 때문에 밸류업 프로그램이 잘 작동할 수 있다고 본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코리아 밸류업 프로그램을 어떻게 보나.
“한국 증시에 추가 투자를 하게 만들 명분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한다. 한국 상장 기업의 투자 정보를 더 많이 투명하게 공개하면 정보 비대칭 문제가 해소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의 서울 증시 투자가 늘어날 것이다. 이걸 더 촉진하기 위해 거래소 차원에서 수요 공급 관리를 더 효율화할 필요가 있다.”
-수요 공급 관리 효율화라니 무슨 말인가.
“서울 증시의 상장 기업 수가 너무 많다. 코스피, 코스닥 상장 기업이 2500개인데, 미국이 5500개쯤 된다. GDP 차이(한미 간 16배)로 봐도 너무 많다. 일본, 대만과 비교해도 그렇다. 상장 기업 1곳당 평균 시가총액이 한국이 1조 정도 되는데 미국은 15조, 일본은 2조, 대만이 1조6000억원 정도 된다. 상장 기업 퇴출 절차가 까다롭고 정무적으로 소액 투자자들의 저항에 무력한 모습을 보여온 탓이다. 퇴출이 안 되고 좀비 기업으로 남아 있으면 불공정 거래 행위의 온상이 된다.”
-’쪼개기 상장’ 같은 병폐도 고쳐야 하지 않나.
“돈 버는 기업은 하나인데, 분할해서 자회사·손자회사를 만들어 2중·3중으로 상장을 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선진국에선 금지 법은 없지만 관례로 중복 상장은 잘 안 한다. 그렇다고 법으로 이중 상장을 금지하는 건 좋은 해법이 아니다. 인수합병(M&A)을 통해 기업을 인수하려는 투자자한테 소액 주주 지분까지 100% 의무 공개 매수를 하라고 하면 대주주의 경영권 프리미엄은 없어진다. 이렇게 되면 M&A가 잘 안 된다. 여러 문제점이 불거진 뒤 제도 보완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 물적 분할한 회사가 5년 이내에 신규 상장을 할 경우에는 주주 보호 조치가 어떻게 됐는지 심사를 받아야 한다. 5년 뒤 상장하더라도 소액 주주에게 반대 매매 청구권을 주도록 했다.”
-이사회의 주주 충실 의무를 상법에 넣자는 주장이 많다.
“대개 회사의 이익과 주주의 이익은 일치한다. 그런데 회사엔 도움이 되는데 소액 주주한테는 손해가 있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3자 배정 유상증자를 할 때, 새 투자자가 회사를 키울 능력이 있어서 주가를 낮게 배정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다. 경제계에서는 주주 충실 의무를 상법에 넣으면 소액 주주들의 소송이 빗발칠 거라고 우려한다. 내 생각엔 꼭 상법일 필요는 없다. 주로 상장 기업이 문제가 된다고 가정하면 자본시장법 보완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소송 남발 요인을 제어하면서 소액 주주 보호를 강화하면 된다.”
-금융투자소득세 논란은 어떻게 푸는 게 좋을까.
“현재 가계 자산의 60%가 부동산인데 앞으로는 금융 자산 비율이 더 커지고, 예금 중심에서 주식 같은 위험 자산 쪽으로 중심축이 이동할 것이다. 세제도 그런 방향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서 위험 자산에 투자했으면 그걸 배당을 통해서 받든, 시세 차익을 통해서 투자 소득을 얻든 간에 똑같이 인센티브는 있어야 된다. 그런데 현행 세제는 배당소득은 이자소득처럼 간주해 종합과세 대상이 되고, 최대 49%(종합과세) 세금을 때린다. 이런 세제하에서 어느 투자자가 주식에 장기 투자를 하겠나. 확정 금리형 금융소득은 종합과세를 하고, 주식 투자에 따른 배당·양도차익은 분리과세하는 게 맞다. 금융투자소득세는 이런 방향의 세제 개편 이후에 도입하는 게 맞다.”
-거래소 이사장으로서 어떤 목표를 이루고 싶나.
“주요국 증시가 모두 전 고점을 돌파하고 있는데, 서울 증시만 지지부진하다. 재임 중 서울 증시의 전고점 돌파를 보고 싶다. 밸류업이 동력이 될 것이다.”
-밸류업 정책으로 더 선보일 내용은.
“주주 친화 노력을 하고 PBR(주가순자산비율) 등 지표 측면에서 우량한 기업을 선별해 밸류업 지수를 만들려고 한다. 9월 말쯤 발표될 거다. 코스피, 코스닥 포함해 최소 100개 이상 기업을 지수에 편입시킬 계획이다. 밸류업 지수가 발표되면 여기에 투자하는 다양한 ETF(상장지수펀드) 상품이 나오고, 국내 연기금, 외국인 투자자들이 밸류업 ETF에 새 투자금을 넣을 것이다. 제대로 작동하면 서울 증시의 전고점 3300 돌파를 견인할 것이라 믿는다.”
세계 최초 ‘실시간 공매도 통제 시스템’ 구축 중
내년 3월 가동 예정… 세계 표준 될 가능성
공매도 금지는 서울 증시가 MSCI(Morgan Stanley Capital International index) 선진국 지수에 편입되지 못하게 만드는 주요 걸림돌이다. 한국거래소는 내년 3월을 공매도 금지 해제 시점으로 잡고, 무차입 불법 공매도를 원천 차단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 시스템이 구축되면 세계 최초가 될 것이다. 이 시스템에 대한 정은보 이사장의 설명은 이렇다.
”현재는 공매도 주문을 낼 때 무차입 공매도인지를 실시간 체크하는 방법이 없다. 우선 공매도 주문을 내는 개별 자산 운용사 단위에서 자체 공매도 점검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예를 들어, 직원 A와 B가 동시에 C 주식을 공매도하면 본의 아니게 무차입 공매도를 할 수 있다. 자산 운용사가 스스로 체크해서 갖고 있는 주식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고 모자라면 차입하도록 자체 점검 시스템을 만들어야 된다. 거래소 차원에서는 중앙 점검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 둘을 연계해야 한다. 개별 기업에 공매도 잔고를 매일 보고하게 하고, 중앙 시스템이 매일 이게 맞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이런 공매도 실시간 점검 시스템은 선진국 증시에도 없다고 한다. 정 이사장은 “이게 만들어지고 잘 작동하면 세계 표준 모델이 될 수 있어 선진국 증시 관계자들도 성공 여부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정은보는 누구?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 기획재정부 차관보, 금융감독원장을 지낸 정통 경제관료. 지난 2월 한국거래소 이사장에 선임됐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군 방위비 추가 분담을 전방위로 압박할 때, 한미 방위비 분담 협상 대사로 활동하며 국익을 방어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