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이 돈 빌리려는 수요를 억누르기 위해 대출 가산 금리를 올리고 있지만 ‘가계빚’ 급증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서울·수도권 집값이 계속 들썩이는 데다 시장금리 하락으로 대출이자 부담이 줄면서 빚을 내 집을 마련하려는 이들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은행들의 올 상반기(1~6월) 가계 대출 증가 폭이 연간 목표치를 훌쩍 넘겼는데도 금융 당국이 예정됐던 ‘대출 제한 조치’ 시행을 늦추며 ‘빚잔치’와 집값 상승을 부추겼다는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가파른 가계 대출 증가세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의 가계 대출 잔액은 지난 18일 기준 712조1841억원으로, 지난달 말보다 3조6118억원 늘었다. 5대 은행 가계 대출은 지난달에만 5조3415억원 늘면서 2021년 7월(+6조2000억원) 이후 2년 11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늘어났었다. 이번 달 가계 대출도 지난달 못지않게 불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달 5대 은행의 하루 평균 신규 가계 대출 금액은 2579억원으로 지난달(2811억원)과 큰 차이가 없다.

그래픽=양인성

최근 가계빚 증가세를 주도하는 것은 주택담보대출이다. 6월(5조8466억원)과 7월(3조7991억원) 모두 주담대 증가액이 전체 가계 대출 증가액보다 많다. 서울 아파트 값이 지난주까지 17주 연속 오르는 등 서울·수도권 집값이 올해 꾸준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어서 더 늦기 전에 집을 사려는 이들이 크게 늘고 있다. 미국이 9월에는 기준금리를 내릴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리면서 시장금리가 빠르게 하락해 이에 연동된 대출금리가 떨어진 것도 빚을 내 집을 사려는 이들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혼합·주기형 주담대 금리에 연동된 금융채 5년물 무보증(AAA) 금리는 지난 19일 기준 연 3.345%로 이달 들어서만 0.106%포인트 떨어졌다. 지난 4월 말 금리(연 3.933%)와 비교하면 3개월도 안돼서 0.6%포인트 가까이 낮아졌다.

그래픽=양인성

주요 은행들이 가계 대출 증가 속도를 늦추라는 당국 압박에 주담대 가산 금리를 이달 들어 0.1~0.2%포인트가량 높였으나, 시장금리 하락 폭이 워낙 커서 ‘금리 인상’에 따른 대출 억제 효과는 미미한 상황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자 장사 비난을 받을까 봐 지금보다 ‘가산 금리’를 더 높이는 것도 어렵다”고 말했다.

◇대출 규제 미뤄놓고, ‘뒷북’ 치는 당국

금융 당국은 가계빚 증가세가 심상치 않자 지난 15일부터 5대 은행과 카카오뱅크를 대상으로 현장 점검에 들어갔다. 은행들이 대출자의 상환 능력을 충분히 확인하고 돈을 빌려줬는지 꼼꼼히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금융 당국이 7월부터 시행 예정이던 ‘스트레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2단계’를 9월 1일로 갑자기 2개월 연기해놓고, ‘뒷북’을 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스트레스 DSR은 실제 대출금리에 ‘스트레스(가산) 금리’를 더해 대출 한도를 산정하는 제도다. 소득은 그대로인데 가산 금리를 더하면 대출자가 갚아야 하는 연간 이자 비용이 늘어나기 때문에 대출 한도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정부는 지난 2월 ‘스트레스 DSR 1단계’를 시행하며 가산 금리를 0.38%로 정했고, 7월 0.75%(2단계)로 올릴 계획이었으나 지난달 말 갑자기 2단계 시행 시기를 9월로 미뤘다.

당시 금융위는 “스트레스 DSR 2단계를 시행할 경우, 소상공인 대출 한도가 줄어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고,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연착륙 지원 등을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5대 은행의 올 상반기 가계 대출 증가액(16조1629억원)이 올해 전체 가계 대출 경영 목표치(12조5000억원)를 30%나 넘어선 상황에서 금융 당국이 대출 제한 조치를 늦춘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지난 18일까지 5대 은행의 가계 대출은 작년 말보다 2.86% 늘었다. 현 추세라면 연말에는 5% 안팎까지 오를 것으로 보인다. 이민환 인하대 교수는 “시행 일주일 전 정책을 미루는 것은 당국의 정책 신뢰성을 크게 떨어뜨릴 수 있다”며 “정부가 ‘집값’을 무조건 잡겠다는 강력한 신호를 주지 않으면 가계 대출 급증세를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