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성규

시중은행들이 주택담보대출 급증세를 틀어막기 위해 전방위적인 대책을 내놓고 있다. 기존에는 대출금리를 올려 은행이 오히려 이익을 보는 방법을 써 왔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대출 만기를 줄이고 대출 한도를 축소하는, 은행 입장에선 ‘고육책’을 사용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은행들을 대상으로 ‘쉽게 금리를 올려서 대응하고 있다’고 질책하며 “더 세게 개입하겠다”고 한 지 하루 만이다. 실수요자들의 피해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복현 금감원장

◇대출 기간 축소, 거치 기간 폐지

KB국민은행은 29일부터 새로운 가계 부채 관리 대책을 시행하겠다고 26일 밝혔다. 우선 수도권 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려 줄 때 대출 기간이 30년으로 일괄 축소된다. 기존에는 대출자가 만 34세 이하인 경우 최장 50년까지 빌릴 수 있었다. 주택을 담보로 빌리는 생활 안정 자금 대출 한도도 물건별 1억원으로 제한된다. 지금까지는 한도가 없었다. 원금은 갚지 않고 이자만 내도 되는 거치 기간을 당분간 없애기로 했다. 현재는 신규 주택 구입 목적 대출 시 1년까지, 주택을 담보로 생활 안정 자금 대출 시 3년까지 거치 기간을 사용할 수 있었다.

신규 주택담보대출과 동시에 소액 임차 보증금 변제 보험에 가입해 대출 한도를 늘려주던 기존 방식도 중단하기로 했다.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소액 임차 보증금(서울 5500만원, 경기 4800만원 등)을 뺀 금액만 대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상 대출 한도를 축소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건물이 없는 나대지를 담보로 한 대출도 내주지 않기로 했다. 현재 최대 1억5000만원인 신규 마이너스 통장 한도도 5000만원으로 제한된다. 은행 관계자는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 소지가 있는 대출을 최대한 줄이겠다는 취지”라고 했다.

그래픽=김성규

이날 우리은행도 9월 2일부터 실행할 추가 대책을 내놓았다. 다주택자가 생활 안정 자금을 목적으로 빌리는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2억원에서 1억원으로 제한하고, ‘갭투자(전세를 끼고 매수)’ 등에 이용되던 일부 전세 자금 대출을 막는 방안이 포함됐다.

◇집 옮겨야 하는 실수요자 피해

그동안 은행들은 대출 급증세를 관리하라는 금융 당국의 요구에 대출금리를 올리는 식으로 대응해 왔다. 지난 7월 이후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은 대출금리를 22번 올렸다. 은행들이 돈을 구하는 조달 금리가 내려가고 있었는데도, 이 기간 신한은행은 주택담보대출 최저 금리를 1.18%포인트, 우리은행은 1.27%포인트 올렸다. 대출자 입장에서는 1억원 대출을 받으면 120만원 안팎 연 이자를 더 내야 하는 것이다.

시중은행들이 금리를 올리자 인터넷 은행이나 2금융권으로 ‘풍선 효과’도 발생했다. 26일 카카오뱅크는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0.5%포인트, 전월세 대출금리를 0.1~0.5%포인트 인상한다고 밝혔다. 주택담보대출 최저 금리를 연 3.57%에서 연 4.07%로 올려 시중은행과 키 맞추기 해 시중은행의 대출 수요를 빨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가계 대출 관리에 책임 있는 당국이 가계대출 증가를 방치하다 ‘관치’로 뒤늦게 ‘뒷북’ 치며 틀어 막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와 금융 당국이 지난해 시장에 푼 특례보금자리론 중 27조원이 신규 주택 구매에 사용됐다. 올 들어도 신생아 특례대출 등 정책금융을 쏟아냈고, 대환대출 등으로 금리를 낮추라는 신호를 은행에 계속 보내왔다. 서민 이자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취지였지만 정부가 나서 아파트값 상승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래픽=김성규

결정적으로 금융 당국은 7월로 예정됐던 대출 규제를 9월로 미뤄버려 시장에 ‘부동산 가격 급등에 손을 놓고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줬다. 그러던 정부가 뒤늦게 은행들의 팔을 비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권에선 “시장 혼란을 은행에 떠넘기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결국 지금 집을 꼭 사거나 전세를 옮겨야 하는 실수요자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고준석 연세대 경영전문대학원 상남경영원 교수는 “은행들이 내놓는 대책이 효과를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경우가 많은 한국 부동산 시장 구조 때문에 효과가 제한적일 것”이라고 했다.

가계 대출 억제 목적으로 대출금리를 높게 유지하면서, 예대 금리 차가 벌어지는 상황이 지속돼 은행권의 반사이익은 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금융 정보 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KB·신한·하나·우리 등 국내 4대 금융지주의 올해 3분기(7~9월) 순이익 전망치는 총 4조7735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 6월 전망보다 두 달 사이 500억원이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