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텔레콤-컴캐스트 T1 게임팀. 왼쪽부터 에포트(이상호), 테디(박진성), 페이커(이상혁), 커즈(문우찬), 칸나(김창동) 선수.

한국이 ‘종주국(宗主國)’으로 있는 e스포츠는 신종 코로나 사태 이후 가장 주목받는 산업 분야 중 하나다. NBA(미국프로농구), EPL(영국 프리미어리그) 등이 코로나로 취소와 재개를 반복하는 중에도 e스포츠는 꿋꿋하게 대회를 이어 갔다. 볼만한 스포츠 경기가 없자, 평소에 보지 않던 e스포츠 중계를 기웃거리다 팬으로 눌러앉은 경우도 많아졌다. 최고 인기 종목인 ‘리그오브레전드(LOL)’의 경우, 6~9월 LCK(한국 정규리그)의 국내 평균 동시 시청자 수가 지난해 대비 74% 폭증한 16만6000명에 달했다.

이렇게 세계적 인기를 끄는 e스포츠 리그의 선수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지난달 22일 e스포츠 구단(球團) ‘T1’의 서울 강남구 본사에서 한국 대표 프로게이머 5명을 만났다. SK텔레콤과 미국 컴캐스트가 공동 운영하는 T1은 전 세계 수백 개 e스포츠 구단 중에서도 독보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신종 코로나 이전엔 매 경기 이들의 이름을 환호하는 팬들이 경기장 안팎을 가득 채웠다. 주장인 ‘페이커’ 이상혁(24) 선수는 방탄소년단, 손흥민 선수와 함께 한국을 널리 알린 ‘3대장’으로 꼽히기도 한다.

◇프로가 될 가능성 ‘0.0018%’

페이커와 팀원 박진성(테디·22)·문우찬(커즈·21)·김창동(칸나·20)·이상호(에포트·20) 선수는 수억~수십억원의 연봉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에게 “e스포츠에 관심 있는 젊은 친구들에게 프로게이머의 삶을 추천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프로를 꿈꾼다면 게임 외의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는 답이 나왔다.

국내에서 LOL을 즐기는 인구는 465만 명에 달한다. 하지만 프로 선수는 85명뿐이다. 0.0018%에 불과한 것이다. 바늘구멍을 뚫은 이들은 지루할 만큼 규칙적이고 반복되는 일상을 보낸다. 에포트는 “낮 12시에 일어나 연습실로 출근, 오후 1~4시와 저녁 7~10시에 두 차례 팀 연습을 한다”고 했다.

그 이후에도 대부분 개인 연습을 하다 밤늦게 잠이 든다. 매일 게임하는 시간은 10시간 이상. 연습량은 태릉선수촌 국가대표 이상이다. 페이커는 “연습량이 많은 만큼 몸이 상하지 않도록 관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정서적 팀워크도 중요하다. 페이커는 “20대 초반의 젊은 남자 5명이 합숙하지만, 게임에 대한 의견을 나눌 때를 제외하곤 의견 충돌이 없는 편”이라고 했다.


현재 국내에서 프로게이머를 양성하는 과정은 아이돌을 키우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와 유사하다. 정기적으로 영입 공지(오디션 격)를 내 전국에서 인재를 찾고, 계약하게 되면 ‘아카데미’에서 실력을 닦는다. 현재 T1아카데미에는 총 7명의 연습생이 프로 데뷔를 꿈꾸며 연습 중이다. 테디는 “이 세계에 발을 들이려면 냉정하게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욕심은 무조건 ‘대회 우승’

이들은 자신 또래의 일반 직장인을 훨씬 뛰어넘는 고연봉자지만 “재정 관리는 부모님이 한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페이커는 연봉이 5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매달 20만원 선의 용돈을 받아 쓴다고 했다. 다른 팀원들 역시 “맛있는 것 사 먹을 때 그나마 돈을 좀 쓰지, 비싸고 멋있는 걸 사는 데는 관심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팀 ‘막내 라인' 중 한명인 칸나는 “나중에 집 하나, 차 한 대 있고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삶을 유지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면서 “지금 당장은 성적을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팀원 모두 “잘해서 이기는 순간이 가장 짜릿하고,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했다. 커즈는 “내 성공의 기준은 무조건 대회 우승”이라고도 했다. 세간의 시선은 여전히 e스포츠를 ‘진지한 스포츠’로 바라보지 않을 때가 잦다. 페이커는 “학술적으로 게임하는 게 어떤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런 구체적인 데이터가 나와야 프로게이머나 이를 지망하는 사람을 마치 ‘게임 중독자’로 보는 시선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SK텔레콤-컴캐스트 T1 게임팀. 왼쪽부터 커즈(문우찬), 페이커(이상혁), 칸나(김창동), 테디(박진성), 에포트(이상호) 선수.

T1 선수들과의 1문 1답

-‘롤드컵’ 진출에 실패했다.

페이커: 이번에 저희 성적이 좋지 않았다. 올 초만 해도 좋았는데.팀 커뮤니케이션이나 부족했던 부분을 다방면으로 보완하려고 노력 중에 있고, 내년엔 어떻게 더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팬분들께서 기대해줬으면 좋겠다.


-마인드컨트롤이 절실했을텐데.

커즈: 게임이 잘 안 되더라도 빨리 잊자고 다짐하는 편이다. 하루 동안은 그 생각에 묻힐 수 있지만, 그 다음엔 또 다음의 경기에 영향을 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에포트: 선수에 따라 진 경기를 복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웬만하면 안 보려는 편이다. 보고 있으면 기억에 많이 남고 감정적으로도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이다.

페이커: 일종의 ‘기억 폭행’을 당하는 기분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엔 굳이 영상을 보지 않아도 내가 실수한 부분이 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머리 속에서 그림처럼 그려져 어떤 부분을 잘못했는지 곱씹는 편이다.

테디: 지는 날엔 하루종일 잔다. 스트레스를 풀려면 그럴 수 밖에 없다.


-코로나 때문에 e스포츠 인기가 늘었다는데, 실감나나?

테디: 오히려 올해는 대부분 ‘무관중’으로 경기를 진행하다 보니 경기 중에 ‘심장이 타오르는’것 같은 느낌이 없어 아쉬웠다. 팬분들이랑 소통하는 재미나, 박진감이 덜했다.

칸나: 팬분들을 못 만나니 실감은 오히려 안 나는 것 같은데, 내년에 LCK 프랜차이즈(일종의 독점 파트너십) 시스템도 생긴다니 간접적으로 영향력이 커졌다는 생각은 든다.


-프로게이머로서의 일상은 어떤가?

에포트: 저희는 일정이 다 똑같게 정해져 있다. 점심 12시에 기상해서, 연습실로 출근한다. 밥도 먹고 게임도 자유롭게 한 판 하고. 1시부터 4시까지는 팀 연습시간이고, 7시까진 개인 시간을 가진다. 이 사이엔 개인 연습을 하거나, 다른 일 처리를 한다. 그리고 7시부터 10시까지 또 팀 연습을 하고, 그 다음엔 알아서 개인 연습을 이어간다.


-하루에 10시간은 넘게 게임을 한다는 말인데.

에포트: 그렇다.


-몸에 무리는 안 오는지?

에포트: 자세가 어쩔 수 없이 집중하고 앉아 있어야 해서 목부터 허리까지 통증이 있다.

페이커: 안 아픈 곳이 없다. 지금은 다들 회사가 짜준 대로 헬스나 스트레칭을 병행하면서 관리한다.


-프로 생활을 시작하려는 젊은 후배들에게 조언한다면

테디: 실력 있으면 잘 되는거고, 아니면 되지 않는 거고. 심플하다. 실력이 좋다면 하루라도 빨리 프로의 세계로 입문하는게 맞다. 학업 병행은 아마 어려울거다. 병행하면야 좋지만, 요즘 준비하는 친구들은 거의 자퇴가 기본이고, 진지하게 임하고 있기 때문에 경쟁이 안되지 않을까.

커즈: 강하게 키우는 게 맞긴 하다. 이 업은 많은 주목에 비례하는 많은 부담이 있기 때문에, 애매하게 해선 안 된다.

에포트: 프로 생활하면서 가장 큰 스트레스는 뭐니뭐니해도 성적이다. 나머지는 다 괜찮다.


-내 자녀가 선수를 한다고 하면 시킬 건가?

에포트: 힘든 만큼 보상이 있으니 잘할 수만 있다면 추천한다. 팬들 앞에서 이렇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은 흔치 않지 않나.

테디: 무엇보다 실력이 문제다. 한다고 하면 지켜는 보겠지만, 아무래도 잘 안된다면 눈치를 줄 것 같다.

페이커: 예를 들어 자녀가 고등학생인데, 매일 12시간 LOL을 하는데도 등급은 플래티넘(상위 15% 정도)이야. 그럼 어떡해?

칸나: 그럼 부족하죠. 프로의 세계에서 잘 한다는건 정말 상위 1~2%를 말하는 거고. 꿈이랑 잘 하는 건 별개니까 다른 길을 찾으라고 할 것 같아요.


-여러분 모두 비슷한 연령층에 비해 고수입자다. 재정 관리는 어떻게 하나.

페이커: 저는 용돈을 받아 쓴다. 돈은 직접 관리하지 않고, 크게 돈을 쓰고 싶은 부분도 없다.

커즈: 저도 부모님이 돈을 관리해주신다. 그 돈을 쓰실 땐 저에게 먼저 말씀을 하신다. 저는 제가 쓰는 카드가 있어서 부모님에게 따로 돈을 받거나 그러진 않는다.

에포트: 솔직히 맛있는 거 먹는 것 외에 돈 쓸 곳이 없다.

페이커: 우리 팀은 명품 같은 것에 관심 있는 사람이 정말 없다. 다른 프로게이머를 보면 그런 분들도 꽤 많은데…우리 팀은 정말 아무 생각이 없다.


-e스포츠 산업 전체를 봤을 때, 개선되어야 할 점은 무엇인가?

페이커: 지금도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졌고, 선수들도 큰 불편함 없이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학술적인 연구가 다른 분야에 비해서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한다. 한국에서 게임에 대한 인식은 아시다시피 아직 그렇게 좋진 않다. 무엇보다 게임이 다른 생산적인 것에 비해 효율이 떨어진다고 보시는데, 게임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뤄졌으면 좋겠다. 이런 데이터가 많아지면 인식도 바뀌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LOL보다 더 사랑스러운게 있을까.

페이커: 우리 강아지 (웃음)

테디: 롤보다 좋다는 건 아니지만. 음악을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아이유고, 아이유의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건 ‘마음’이다.

에포트: 내 밝은 미래(웃음). 밝은 미래라는 건 지금보다 더 성공해서, 아무런 걱정 없이 마음도 건강하게 산다는 뜻이다. 그게 게임을 하는 이유 아닐까.


-여러분에게 ‘성공’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최종 스테이지’가 있나?

에포트: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직업이기 때문에, 성공은 곧 대회 우승이다.

테디: 사람마다 성공에 대한 기준은 다르겠지만, 난 아직 성공을 못한 것 같다. 좀 더 열심히 해서 대회 우승을 많이 하면 성공했다고 느낄 것 같다.

페이커: 마음이 풍족한 삶, 주변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삶이 성공 아닐까. 물론 우승을 하면 마음이 저절로 풍족해질 것 같다.

커즈: 프로게이머로서는 우승이 최고다. 인간적으로는 상혁형이 말한 것처럼 스스로 불필요한 걸 내려 놓고 만족하는 삶을 사는 상태가 성공 같다.

칸나: 물론 우승이 중요하다. 사회적으로는 집 한 채, 차 한 대, 그리고 먹고 살 수 있으면 성공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