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9일(현지 시각) 미국의 반도체 기업인 마벨테크놀로지는 경쟁사 인파이를 100억달러(약 10조86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마벨은 “클라우드와 5G(5세대 이동통신) 인프라에서 리더십과 성장을 가속화하려고 인파이 인수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 거래로 올해 세계 반도체 시장 인수·합병(M&A) 금액은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전 반도체 업계에서 M&A 규모가 가장 컸던 해는 2015년이었다. 2015~2016년 50여 차례에 걸쳐 1675억달러(약 181조원) 규모의 M&A가 일어났고, 2017년부터 반도체 업황은 ‘수퍼 사이클’이 시작됐다. 업계 전문가들은 올해 반도체 기업 M&A가 사상 최대를 기록한 것을 두고 2015년과 같은 ‘수퍼 사이클(최대 호황기)’의 전조(前兆)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2015년엔 기술 통합, 올해는 AI 반도체

8일 IT 시장조사 업체인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올 들어 현재까지 세계 반도체 시장 M&A 규모는 1150억달러(약 124조원)로 집계됐다. 작년 한 해 M&A(315억달러) 금액보다 265% 급증했고, 2015년 사상 최대(1077억달러) 기록을 넘어섰다. 현재 대만의 반도체 소재 업체 글로벌웨이퍼스가 독일의 실트로닉 인수를 타진 중인데, 협상이 마무리되면 올해 M&A 규모는 1195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테크 시장의 본질적인 변화가 나타났을 때 M&A가 활발히 이뤄진다고 본다. 기존 반도체 시장 M&A 최대액을 기록한 2015년에는 사물인터넷(IoT)과 자율주행 기술이 새롭게 떠오르며 ‘기술 통합’이 최대 화두였다. 반도체 회사들은 M&A를 통해 새로운 기술을 흡수하고, 회사 몸집을 키워 성장을 가속화했다.

싱가포르 반도체 업체 아바고가 미국 통신칩 회사 브로드컴을 370억달러에 인수했고, 미국 메모리반도체 회사 웨스턴디지털이 샌디스크를 190억달러에 인수한 게 대표적이다.

올해는 인공지능(AI) 반도체와 클라우드, 5G(5세대 이동통신)가 본격화하면서 ‘비대면’이라는 코로나 사태와 맞물려 대형 M&A가 이어졌다. 지난 9월 미국의 엔비디아가 수퍼 컴퓨팅 분야 등을 강화하기 위해 영국의 ARM을 400억달러에 인수했고, 10월엔 AMD가 통신 인프라 사업 진출을 위해 자일링스를 350억달러에 인수했다. 같은 달 SK하이닉스도 기업용 SSD(대용량 저장 장치) 시장을 노리고 한국 M&A 사상 최대인 90억달러에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을 인수했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은 “2015년에는 사물인터넷과 자율주행차 등 새로운 사업 분야가 열리면서 M&A가 급증했다”며 “올해는 포스트 코로나 이후 재편될 반도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대형 M&A가 줄을 이었다”고 했다.

◇ “M&A 증가는 수퍼 사이클 전조” 기대

올해 반도체 시장 M&A 시장이 뜨겁게 달궈지면서 업계에서는 내년 호황을 기대하고 있다. M&A를 통해 몸집을 불린 ‘빅플레이어’가 등장하고, 시장 규모를 키우면서 전체 업황이 개선된다는 것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M&A는 기업들이 새롭게 열리는 시장을 발 빠르게 감지하고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빠른 수단”이라며 “대형 M&A가 열리는 것은 결국 새로운 시장이 크게 개화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지난 2015년 반도체 M&A가 사상 최대를 기록한 이후 2015~2016년 연간 3500억달러 안팎이었던 반도체 시장은 2017년 4320억달러, 2018년 4851억달러로 크게 확대됐다. 옴디아에 따르면 올해 4515억달러 규모인 세계 반도체 시장은 2021년 4890억달러, 2022년 5423억달러로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중국이라는 복병(伏兵)도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엔비디아-ARM’ ‘SK하이닉스-인텔 낸드플래시’ 빅딜에 대해 반도체 강국을 꿈꾸는 중국이 반대하고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2016년 퀄컴의 NXP 인수도 중국이 반대해 무산됐다. 빅딜이 무산될 경우 반도체 시장 재편과 이에 따른 호황 효과가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