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은 인류 역사상 몹시 과대평가(overhyped)된 기술 중 하나다.”

가상 화폐 투자 열풍이 사그라들며 비트코인 가격이 절벽처럼 추락했던 지난 2018년 3월. ‘닥터 둠(Doom·종말)’으로 유명한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블록체인에 대해 이처럼 비판했다. 당시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블록체인 업체 중엔 사업 계획서 하나로 투자금을 유치하고 잠적하는 사기꾼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3년이 지난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다. 사용처가 없던 ‘소문 속 기술’이던 블록체인이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서비스로 나타나고 있다. 자본력과 기술력을 갖춘 IT 대기업이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영향이 컸다. 코로나 이후 여행의 필수품이 될 것으로 꼽히는 ‘백신 여권’부터 작품 한 편이 무려 수백억원에 낙찰돼 글로벌 경매 시장을 발칵 뒤집은 디지털 예술 작품까지 최근 화제가 된 이슈 뒤에 모두 블록체인 기술이 깔려 있다. 업계에서는 “블록체인의 ‘2차 붐’이 시작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블록체인, ‘디지털 자산’ 시대 열어

블록체인은 중앙 서버를 쓰지 않는 대신 데이터를 여러 컴퓨터에 분산 저장하는 기술이다. 동일한 데이터가 여러 곳에 동시에 기록되기 때문에, 컴퓨터 몇 대를 해킹한다고 기록을 임의로 바꿀 수는 없다. 블록체인이 이론적으로 위·변조가 불가능한 것도 이런 원리 때문이다.

블록체인이 만들어낸 대표적 신(新)시장이 ‘디지털 자산’ 매매 시장이다. 잭 도시 트위터 창업자가 경매에 내놓은 사상 첫 트위터 게시 글이 28억원에 낙찰을 앞두고 있고, 최근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선 사진 파일에 불과한 디지털 그림 ‘매일: 첫 5000일’이 783억원에 팔렸다. 이런 거래가 가능한 것은 NFT(non fungible token·대체 불가능 토큰)라는 블록체인 원본 보증 기술이 무한 복제 가능한 디지털 파일에 ‘유일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를 비롯한 창작자들이 영상·음원 등 온갖 파일에 NFT를 붙여 판매하기 시작했고, 거래소도 대거 생겨나고 있다. 국내에서는 게임사 위메이드가 올 하반기 게임 내 아이템을 NFT로 사고파는 거래소를 도입할 예정이다.

NFT를 자금 세탁에 악용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될 정도다. 21일(현지 시각)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는 자금 세탁 감시 대상인 가상 자산의 정의를 종전의 ‘(화폐) 대체 가능한 자산’에서 ‘변환 및 상호 교환 가능한 자산’으로 확대했다. 이전에는 가상 화폐를 이용한 자금 세탁만 단속할 수 있었지만, 이제 NFT 시장까지 규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바일 신분증' 시대 성큼

블록체인의 위·변조 불가 특성은 신분증·여권 등 인증 시장에서 이미 널리 활용되고 있다. 특히 각국에서 코로나 백신을 접종하면서, 백신을 맞은 사람들에게 이른바 ‘백신 여권’을 발급하자는 논의가 뜨겁다. 블록체인 기반의 이 여권을 소지한 사람은 자유롭게 국경까지 넘나들게 하자는 취지다. 위조가 불가한 이 증명서에는 접종 날짜와 백신 종류, 의사 소견서 등이 저장된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오러클, IBM 등이 블록체인 백신 여권 제작에 나섰다.

네이버, 카카오, 이통 3사가 선보인 모바일 신분증도 블록체인 기반 서비스다. LG CNS가 구축하고 라온시큐어가 기술을 제공한 행정안전부의 모바일 공무원증과 카카오톡·패스(PASS) 앱 등에서 시범 운영 중인 모바일 운전면허증은 모두 블록체인으로 ‘원본’을 인정받는 방식이다.

블록체인은 사기 우려가 많았던 명품 중고 거래에도 활용된다. 국내 스타트업 트러스트버스는 지난 17일 블록체인으로 중고 명품 시계에 대한 감정과 인증, 위탁 등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거래 앱 ‘캔버스’를 출시했다. GS홈쇼핑이 투자한 명품 거래 앱 ‘구하다’ 역시 블록체인으로 품질 이력을 공개한다. 블록체인을 활용한 금융 거래도 영역을 넓히고 있다. 가상 화폐를 일정 기간 예치하면 가상 화폐로 이자를 받고, 가상 화폐로 개인 대출을 해주고 이자를 받는 것도 가능해졌다.

이군희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최근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 화폐 가격이 급등한 것도 블록체인 서비스가 많아진 영향이 있다”고 말했다.

☞NFT

Non Fungible Token(대체 불가 토큰)의 약칭으로, 블록체인 기술로 만들어진 일종의 인증서. 각 NFT마다 고유의 값을 지니고 있어 다른 NFT로 대체 불가하며, 그 정보는 위·변조도 불가능하다. 이런 특성 덕분에 수없이 복사가 가능한 디지털 자산의 원본을 증명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