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급 부족에 따른 파장이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미국 뉴스 매체 블룸버그는 “자동차 생산 차질로 알루미늄 업계가 주문 감소에 대비하는 등 반도체 부족의 영향이 산업 전 분야로 확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제조업의 정점에 있는 자동차 생산이 감소하면 철강, 전자 장비, 부품 등 사실상 모든 산업이 영향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지난달 미국 텍사스주의 기록적인 한파로 가동이 중단됐던 오스틴 반도체 공장이 지난주부터 정상 가동단계에 들어갔다고 30일 밝혔다. 사진은 삼성전자 미국 오스틴 반도체 공장 전경. /삼성전자

노무라 증권은 31일 올해 2분기 글로벌 자동차 생산이 160만대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고, 컨설팅 업체 알릭스파트너스는 올해 자동차 업계의 손실이 610억달러(약 69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기아의 한 해 매출(59조원)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다.

주문형 반도체를 위탁 생산하는 파운드리 업체들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스마트폰과 통신 장비·TV·가전·컴퓨터 생산도 차질을 빚고 있다. 미국 통신칩 제조 업체 브로드컴은 “지난해 2월 반도체를 주문하면 납품까지 12주가 걸렸는데 지금은 22.2주가 걸린다”고 했다. 스마트폰용 첨단 반도체는 주문한 뒤 30주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공급 부족 현상이 내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반도체 업체들의 공장 증설에 막대한 비용이 필요한 데다, 반도체 장비와 소재 공급도 일시에 늘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백신 보급으로 코로나 종식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반도체 부족이 경기 회복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우려까지 나온다.

아이폰도 생산 차질… “반도체 부족이 경기회복 걸림돌”

자동차 산업에서 시작된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이 IT·가전 산업으로 확산하면서 글로벌 산업계가 아우성을 치고 있다. 자동차·가전제품 구동용 전력 제어 반도체부터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첨단 통신칩까지 사실상 모든 반도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반도체 공급 부족이 재앙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자동차·IT 업체에 부품과 소재를 납품하는 후방 산업군도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대규모 장치 산업인 반도체의 특성상 빠른 시일 내에 공급 부족이 해소되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업체들이 재고 확보를 위해 필요보다 더 많은 반도체를 주문하는 악순환까지 벌어지고 있다.

◇자동차가 촉발한 반도체 대란

반도체 대란의 단초는 자동차 업체들의 수요 예측 실패였다. 자동차 업체들은 지난해 초 코로나 확산으로 매출이 급감하자 반도체 주문을 대폭 줄였다. 그러자 파운드리(위탁 생산) 업체들은 차량용 반도체 생산량을 줄이는 대신 재택근무 등으로 수요가 폭증한 스마트폰·PC용 반도체 생산량을 늘렸다. 블룸버그는 “자동차 판매량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되면서 차량용 반도체 수요가 급증했지만, 파운드리 업체들은 이미 다른 반도체 주문을 받아놓은 상태였다”고 했다. IT 기기용 반도체는 차량용 반도체보다 비싸고 수익률도 높다. 파운드리 업체들이 자동차용 반도체로 공정을 급하게 되돌릴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 들어 차량용 반도체 업체들의 공장에 사고까지 잇따랐다. 미국 한파로 NXP 등 텍사스의 차량용 반도체 공장들이 한 달 가까이 멈췄고, 일본 르네사스 공장은 지진과 화재로 7월까지 정상화가 어려울 전망이다.

/그래픽=백형선

완성차 업체들의 감산은 다른 산업에 영향을 미친다. GM·도요타·현대자동차 등 글로벌 자동차 업체의 공장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타이어·제철 등 주요 부품 업계도 전전긍긍하고 있다. 작년 초 코로나 여파로 중국에서의 전선 부품 수급이 늦어지면서 국내 자동차 공장들이 잇따라 문을 닫자, 국내 부품 업계 가동률이 30%대까지 떨어지는 등 산업 생태계 붕괴 위기에 내몰렸다. 국내 한 타이어 업계 관계자는 “생산 물량을 조절해야 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IT·가전 업체들도 비상이다. 애플 최대 협력사인 대만 폭스콘은 지난 30일(현지 시각) 열린 실적 발표에서 “반도체 부족으로 아이폰 생산량이 10% 줄었다”고 밝혔다. 폭스콘은 반도체 부족이 내년 말까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삼성전자 역시 스마트폰 사업부 임직원들이 매일 아침 반도체 공급 관련 대책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월풀은 중국 공장에서 생산해 미국과 유럽으로 보내는 가전제품 생산량이 25%나 줄어들며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다고 밝혔다. TV용 LCD 패널에 들어가는 디스플레이 구동칩 부족으로 LCD 패널 가격도 폭등하고 있다.

◇공급 부족 고착 가능성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이 완전 해소가 어렵고, 일종의 뉴노멀(새로운 표준)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우선 전기차 보급이 확대되면서 자동차에 들어가는 반도체 수가 급증하고 있다. 시장 조사 업체 IHS는 2030년 전체 차량에서 전자 장치의 비율이 45%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자율주행차의 경우 탑재되는 반도체가 2000개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IT·가전도 인공지능 탑재 등으로 부품 중 반도체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다. 김정호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는 “반도체 공급난은 몇 년간 지속될 뿐 아니라 더 심화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 교수는 “반도체 생산국의 이해관계가 다 달라서 원활한 글로벌 공조나 빠른 생산량 증대는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유럽 등 세계 각국은 앞다퉈 ‘반도체 독립’을 외치고 있다. 삼성전자·TSMC 등이 주도하고 있는 파운드리 생산 구조를 바꿔 자국 기업이 우선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체계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미국 인텔은 지난 23일 200억달러를 들여 미국 애리조나에 파운드리 공장 두 곳을 짓겠다고 선언했고, 유럽도 독일·프랑스 주도로 180조원 규모의 반도체 자립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