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북 정기 구독 서비스 ‘윌라’를 운영하는 인플루엔셜은 지난달 29일 고(故)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오디오북을 출시했다. 원작 소설 1권에 해당하는 오디오북 1개의 재생 시간만 11시간이 넘지만 서비스 시작 하루도 안 돼 자사(自社) 서비스 다운로드 1위에 올랐다. 전집(총 20권)의 재생 시간은 200시간이 넘는다. 업체는 지난 1년간 전문 성우 16명을 동원해 200자 원고지 4만장 분량의 토지 전집을 녹음했다. 이용자들 사이에선 “소설에 자주 나오는 ‘-꼬망’ ‘-슴둥’ 같은 방언이 제대로 표현될까 걱정했는데 마치 실사 영화를 감상하는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을 받았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인플루엔셜 관계자는 “토지 오디오북은 50대 이상 장년층뿐 아니라 20~30대 젊은 이용자에서도 높은 호응을 보였다”며 “앞으로 삼국지·수호지 등 다른 장편소설의 오디오북도 출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최근 인기 영화·드라마·소설이 오디오북으로 제작되는 등 ‘오디오 콘텐츠’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고(故) 신해철씨의 음성을 복원한 KT의 라디오 방송, 스웨덴 스토리텔이 제작한 해리포터 오디오북, 대하소설 ‘토지’ 오디오북을 제작한 윌라의 광고, 네이버가 제작한 웹소설 원작 오디오 영화 ‘그대 곁에 잠들다’, /KT·스토리텔·인플루엔셜·네이버

넷플릭스·유튜브 등 영상 서비스 전성시대에 오로지 귀로 듣는 ‘오디오 콘텐츠’가 각광받고 있다. 올 초 음성 채팅 앱 클럽하우스 열풍으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소셜네트워크 서비스가 쏟아진 데 이어 드라마·영화·예능 프로그램 등 영상 콘텐츠를 오디오로 제작하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는 것이다.

◇듣는 소설·드라마·영화

영화·뮤지컬의 보조 수단이었던 오디오 콘텐츠는 최근 그 자체로 수익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콘텐츠 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스웨덴 오디오북 업체 스토리텔이 제작한 할리우드 영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의 오디오북은 지난달 기준 한국과 미국을 비롯, 전 세계 25국에서 누적 청취 시간 2600만시간을 기록했다. 화려한 컴퓨터그래픽이나 시각 효과 없이 성우들의 목소리 녹음만으로 1000만명 가까운 사용자를 끌어들인 것이다. 특히 스마트폰·태블릿PC와 연결할 수 있는 무선 이어폰 사용이 크게 늘면서 오디오 콘텐츠 산업 규모도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지난 2019년 220억달러(약 26조원) 수준이던 전 세계 오디오 콘텐츠 시장이 오는 2030년엔 753억달러(약 89조원)까지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스포티파이의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한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 /스포티파이

시장이 커지면서 기업들도 앞다퉈 오디오 콘텐츠 투자를 늘리고 있다. 넷플릭스처럼 오리지널(독점) 콘텐츠를 제작해 유료 이용자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음원 서비스 업체 지니뮤직은 지난달 26일 다양한 오디오 콘텐츠를 들을 수 있는 스토리G 서비스를 시작했다. 웹소설·웹툰 업체 스토리위즈의 작품을 원작으로 자체 제작한 오디오 드라마와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을 서비스하고 있다. 음원 업체 플로는 영화감독 장항준과 함께 스릴러·판타지·로맨스 장르의 오디오 드라마를 제작하고 있다. 세계 1위 음원 업체 스포티파이는 올 초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영국 해리 왕손 부부의 팟캐스트 콘텐츠를 제작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팟캐스트 방송에 록 스타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함께 출연해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미국의 영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픽=송윤혜

◇AI가 오디오의 부활 이끌어

AI(인공지능)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해 유명인의 음성을 합성한 오디오 콘텐츠 제작도 활발하다. KT는 지난 9월 가수 겸 라디오 DJ였던 고(故) 신해철씨의 음성을 AI로 복원해 라디오 방송을 만들었다. 신씨가 과거 공중파에서 진행한 라디오 방송을 AI에 학습시켜 그의 육성을 되살린 것이다. 네이버는 배우 유인나,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오상진씨의 목소리를 합성해 뉴스 본문 듣기, AI 스피커 등에 서비스하고 있다.

최근 유튜브에서도 영상을 보지 않고 소리만 듣는 콘텐츠가 인기를 얻고 있다. 화면을 보지 않고 강의·오디오북 내용을 듣거나, 명상 음악을 배경음악처럼 틀어놓는 식이다. 지난달 22일 유튜브 랭킹에 따르면 오디오북 콘텐츠가 교육·강의 분야에서 조회수 4, 5위에 올랐다. 일부 유튜브 명상 영상은 조회수가 5000만회를 넘기도 한다.

IT 업계 관계자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려면 일정 시간 모니터에 집중해야 하지만 오디오 콘텐츠는 소리를 켜놓은 채 방 청소를 하거나 다른 사람과 메신저를 주고받는 등 자유도가 높다는 점도 매력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