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정이 깨진 아이폰. 애플은 17일(현지시각) 사용자가 서비스 센터에 가지 않아도 스스로 부품을 주문해 수리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AP 연합뉴스

형편없는 A/S(애프터서비스)로 악명 높은 애플이 바뀌었다.

애플은 17일(현지시각) 아이폰12와 아이폰13, M1 칩을 탑재한 맥북 컴퓨터를 고객 스스로 수리하는 셀프 수리 서비스 제도를 내년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애플은 제품을 정식 서비스 센터에 가야만 수리할 수 있고, 간단한 부품이 문제를 일으켜도 전체를 교체해야 하는 폐쇄적인 수리 정책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를 바꿔 소비자가 직접 필요한 부분을 수리하는 형태의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가장 보수적인 수리 정책을 고수하던 업체가 단번에 가장 개방적으로 변신한 셈이다.

이 제도는 고객이 애플 순정 부품을 ‘애플 셀프 서비스 수리 온라인 스토어’에서 별도 구매해 애플이 제공하는 설명서에 따라 스스로 수리하는 형태다. 수리를 위한 전용 공구도 지원해준다. 애플은 일단 아이폰 디스플레이와 배터리, 카메라와 같이 기본 기능에 들어가는 모듈을 중심으로 셀프 수리 서비스를 시작하고, 이후 추가 셀프 수리 가능 영역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온라인을 통해 수리를 위한 부품과 도구를 구입하는 비용은 정식 서비스센터에서 수리하고 지불하는 금액과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라고 미 IT 매체 씨넷은 보도했다. 셀프 수리를 해도 이후 보증 기간이나 조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사용자가 스스로 애플 기기를 수리하는 모습의 일러스트 /애플

이 서비스는 내년 초 미국에서 먼저 시작되고, 여러 국가에 확대 적용된다. 제프 윌리엄스 애플 COO(최고운영책임자)는 “최근 3년간 애플은 애플 정품 부품과 도구를 사용해 수리하는 서비스 센터를 2배 가량 늘렸고, 이제는 고객 스스로 수리할 수 있는 옵션을 제공한다”고 했다. 다만 애플은 이 셀프 수리 제도가 전자기기 수리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대부분의 고객은 전문 수리 업체를 방문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애플은 스스로 제품을 수리하는 고객이 고장난 부품을 반납하면 향후 제품 구입 등에 활용할 수 있는 크레딧을 주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역시 정부 압박 때문

애플이 수리 정책을 변경한 이유는 결국 정부와 규제 기관의 압박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동안 애플 소비자는 고장난 아이폰을 애플 공인인증 업체가 아닌 사설 업체에서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으면, 보증기간이 남아있더라고 제대로 된 수리 서비스를 보장받지 못했다. 애플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기기에 인위적인 개조를 하지 않았어도, ‘무단변조 흔적이 있어 보증이 어렵다’는 애플 측의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아무런 조치를 받지 못한 사람도 많다.

고장난 아이폰을 정식 서비스 센터에 맡기려고 해도 애플 공인인증 업체가 주변에 많은 것도 아니다. 애플 기기가 고장나면 수리해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CNN은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이 수리 권한을 독점해 소비자들이 기존 기기를 고치기보다 새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해왔다”고 했다.

한 여성이 중국 베이징 애플스토어 앞에 있는 아이폰13프로 광고판을 지나가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하지만 지난 7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스마트폰 제조업체가 제품 수리 권한을 통제하는 독점적 관행을 시정하라고 행정 명령했고, 미국의 공정거래위원회인 ‘연방거래위원회(FTC)’가 바이든 대통령의 행정 명령에 따라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의 수리 제한 관행을 제재하기로 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수리할 권리(Right-to Repair)’를 보장해야 된다는 것이다.

FTC는 미 실리콘밸리 빅테크를 겨냥한 반독점 제재를 추진하고 있다. 테크 업계 관계자는 “FTC가 본격적으로 수리 관행 부분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제재에 나서겠다고 하면서 애플로서는 어찌됐건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했을 것”이라고 했다.

애플의 이 조치는 사용자들이 아이폰 등 애플 기기를 더 오래 사용하도록 만들고, 제품 폐기물을 줄여 환경을 도울 수 있다. 테크 업계에서는 애플의 이러한 행보가 삼성전자나 마이크로소프트 등 다른 IT 기기 제조업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수리할 권리 추구 움직임의 큰 승리”라며 “애플이 수리에 대한 새로운 표준을 설정하면서 다른 기술 제조업체도 이를 따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