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경기도 용인 지곡산업단지에서 열린 세계 3위 반도체 장비회사 램리서치의 코리아테크놀로지센터(KTC) 개관식에서 주요 참석 인사들이 LED 터치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제임스 김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 크리스토퍼 델 코소 주한미국대사대리, 백군기 용인시장, 이한규 경기도 행정2부지사, 팀 아처 램리서치 CEO, 박진규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 곽노정 한국반도체산업협회장(SK하이닉스 사장), 정은승 삼성전자 최고기술책임자(CTO), 이상원 램리서치 한국법인 대표. /램리서치

세계 3위 반도체 장비 기업 미국 램리서치가 26일 경기도 용인 지곡산업단지에서 최첨단 연구개발(R&D) 시설인 코리아테크놀로지센터(KTC)를 열었다. 램리서치가 아시아에 짓는 첫 R&D 센터로, 3만㎡ 규모에 최대 50개 장비(챔버)가 들어가는 클린룸을 갖췄다. 램리서치는 반도체 웨이퍼에 회로 패턴을 그리는 식각 장비 분야 1위 업체로 작년 매출은 20조원에 달한다.

세계 1위 반도체 장비 업체 미국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도 한국에 R&D 센터를 짓기로 하고 부지 선정 작업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2위 네덜란드 ASML은 2024년 완공을 목표로 경기 화성에 첨단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 중이다.

한국이 세계 반도체 장비 업계의 R&D 허브로 떠오르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장비 시장의 60%를 차지하는 1~4위 업체들이 한국에 생산·연구 거점을 잇따라 마련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의 무역 제재로 인해 중국이 후보지에서 밀려나면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포진한 한국이 선택받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램리서치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향후 10년 이상 전 세계 반도체 시장과 기술을 선도할 것으로 보고 한국을 선택한 것”이라면서 “한국이 소재·부품·장비를 망라한 반도체 생태계에서 글로벌 테스트베드이자 기술 허브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램리서치가 26일 용인에 개관한 코리아테크놀로지센터(KTC) 전경. /고운호 기자

◇세계 반도체 장비 업체 1~4위 한국에 거점

팀 아처(55) 램리서치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개관식에서 본지와 만나 “한국은 글로벌 반도체 장비 업체들이 주목하는 국가”라며 “지난해 램리서치는 한국 공장에서 생산량을 2배 이상 늘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옹스트롬(100억분의 1m) 단위의 정확도를 갖춘 램리서치의 기술력은 3차원(3D) D램 등 한국 기업의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지원할 것”이라며 “한국은 램리서치의 해외 사업 전초 기지로서 향후 KTC 모델을 (일본·대만 등) 다른 아시아 국가에도 이식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또 “KTC의 클린룸은 처음부터 증설 공간을 확보해 언제든 시설 확장에 대비할 수 있게 했다”면서 “한국의 D램·낸드플래시·로직반도체(처리장치) 선도 기업들과 가까운 거리에서 협업하며 이들의 생산성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하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팀 아처 램리서치 최고경영자(CEO)가 26일 경기도 용인의 코리아테크놀로지센터(KTC)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고운호 기자

세계에서 유일하게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를 제조하는 네덜란드 ASML은 지난해 11월 경기도 화성에 2024년까지 2400억원을 투자해 1만6000㎡ 규모 첨단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피터 베닝크 ASML CEO(최고경영자)는 지난해 11월에 이어 이달에도 방한해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고위 경영진을 만났다.

이뿐이 아니다. 세계 4위 장비 업체인 일본의 도쿄일렉트론(TEL)은 이달부터 1000억원을 들여 화성의 R&D 시설을 대규모 증축한다. 내년 10월까지 지상 6층, 연면적 1만평 규모의 첨단 R&D 센터를 준공할 예정이다. 반도체용 이온 주입 공정 장비를 개발하는 미국 엑셀리스는 최근 경기 평택시 생산 시설 추가 투자 의사를 밝혔다.

세계 주요 반도체 장비 업체들의 한국 거점 확대는 유례 없는 글로벌 장비 투자 경쟁 속에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한발 앞서 나갈 기반이 될 전망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고 코로나 봉쇄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물류난이 일어난 상황에서 노광·식각·증착 등 핵심 공정에 필요한 반도체 장비들의 공급난마저 가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 7일 “반도체 칩 제조 핵심 장비의 리드타임(주문에서 최종 공급까지 걸리는 기간)이 지난해 12~18개월에서 최대 30개월로 늘어났다”고 했다. 지난 20일 피터 베닝크 ASML CEO는 실적 간담회에서 “일부 기업들이 반도체를 구하려고 세탁기를 사서 내장된 부품을 뜯어내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라고 했다.

◇해외 반도체 장비 전문가 유입되고 국내 인재 양성 확대

해외 반도체 장비 회사들이 한국에 몰려오면서 수입에 의존하던 반도체 장비 자립화와 고급 인재 양성에도 힘이 실릴 전망이다.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 한국지사는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1000여 명을 채용했고, 올해는 최대 300명을 추가로 채용할 방침이다. 램리서치도 박사 학위 소지자를 비롯한 핵심 엔지니어 등 100여 명을 이미 채용한 데 이어 자사 장비에 들어가는 부품과 소재의 국산화도 추진하겠다는 방침이다. 황철성 서울대 석좌교수는 “해외 주요 반도체 장비 업체가 국내에서 대규모 인력 채용을 하면 국내 인력난이 일시적으로 가중되겠지만, 이들 기업이 고용한 인재들은 최고 수준의 반도체 인력으로 성장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글로벌 반도체 장비 회사가 국내에서 연구·생산을 늘리면 한국의 반도체 기술력도 자연히 올라가게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