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호 LB인베스트먼트 대표는 "내년에 올해보다 20% 이상 많은 2500억원가량을 스타트업에 투자할 계획"이라며 "시장에 자금이 돌지 않는 혹한기가 역설적으로 창업과 투자에는 최적의 타이밍"이라고 했다. /고운호 기자

“업종을 대표하는 스타트업들도 구조 조정에 나설 만큼 업계 전체가 얼어붙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기술력과 탄탄한 비즈니스 모델을 갖춘 스타트업은 더 빛이 납니다. 우리는 내년에 올해보다 20% 이상 많은 2500억원가량을 이런 스타트업들을 찾아 투자할 겁니다.”

박기호(58) LB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지난 9일 서울 강남 사무실에서 진행한 본지 인터뷰에서 “시장에 자금이 돌지 않는 혹한기가 역설적으로 창업과 투자에는 최적의 타이밍”이라며 “스타트업 옥석(玉石) 가리기가 이제 시작됐다”고 말했다. 잘나가던 유니콘(기업 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도 기업 가치가 50%가량 줄어든 상황에서, 이전처럼 적자를 내면서도 투자를 받아 몸집만 키우던 성장 공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내년 글로벌 경기 불황을 앞두고 박 대표는 “스타트업 간 인수·합병이 활발해지고, 탄탄한 매출과 이익을 내는 기술을 갖고 뾰족한 비즈니스를 하는 스타트업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LB인베스트먼트는 운용 자산이 1조원을 넘는 국내 대표 벤처캐피털이다. BTS(방탄소년단)의 기획사 하이브, 글로벌 히트작 ‘검은사막’을 만든 게임사 펄어비스 등이 이 회사의 투자를 받았다. 1996년 LG그룹이 설립한 LG벤처투자가 전신(前身)으로, 이후 계열 분리를 통해 독립했다. 1988년부터 30년 넘는 벤처투자 업계 경력을 가진 박 대표는 지난 2003년 LB인베스트먼트에 합류해 주요 투자를 이끌어왔다.

그는 향후 유망 스타트업 분야를 ‘테크’와 ‘K콘텐츠’로 꼽았다. 구체적으로 테크 스타트업 중에선 ‘AI(인공지능)’와 ‘SaaS(클라우드 기반의 구독형 소프트웨어)’를 꼽았다. “기업들이 어떻게든 비용을 줄여보려는 경기 침체기에선 비용 감소는 물론, 업무 효율화까지 도움을 주는 기술들이 각광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류·스마트팩토리 AI처럼 실전 사용이 가능한 AI가 필요하죠. 클라우드와 구독을 결합시켜 관리, 운영 비용을 줄여주는 소프트웨어(SaaS)도 마찬가지입니다.” LB는 올해 전체 투자 금액(2000억원)의 10%가량을 스포츠 데이터 분석 업체 ‘비프로’와 같은 SaaS 기업에 썼다.

미·중 갈등으로 공급망 리스크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반도체·전기차 분야의 핵심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벤처기업들도 투자 유치와 기업 공개(IPO)가 모두 수월할 것으로 박 대표는 내다봤다. 또 그는 “K콘텐츠 전성기도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앞으로는 K콘텐츠가 패션·외식 프랜차이즈 등 다양한 사업과 결합하면서 영역이 확장될 것”이라고 했다. 하이브에 투자했던 것처럼 내년에도 유망한 콘텐츠 기업에 적극 투자한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박 대표는 인터뷰 내내 “지금 같은 불황은 투자자뿐 아니라 창업자에게도 적기(適期)”라고 강조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초기 스타트업의 기업 가치는 크게 깎이지 않았고, 오히려 초기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더 활발하다”는 것이다. 그는 “불황에 창업해서 호황에 수익을 실현하는 것은 투자와 창업 모두 해당한다”고 했다.

30년 이상 수많은 창업자를 만났던 박 대표는 창업자와 기업을 평가할 때 ‘회사와 사업을 요약한 말과 글’을 꼭 본다고 했다. 박 대표는 “좋은 기사는 제목과 첫 문장만 보면 바로 이해되듯이, 대표가 회사와 사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설명한다는 것은 비즈니스에 대한 준비가 잘돼 있다는 의미”라고 했다.

LB인베스트먼트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있다. 박 대표는 “중국은 국가 주도로 인프라에 투자하고 있어 혁신형 스타트업의 성장과 상장은 어려운 상황”이라며 “하지만 동남아는 그랩처럼 여전히 혁신 스타트업이 여럿 나올 가능성이 풍부한 만큼 동남아를 비롯한 해외 스타트업 투자를 계속 늘려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