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산업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이 중심이다. 국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 대부분이 삼성 혹은 SK하이닉스와의 거래에 의존하는 ‘갑을 관계’인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은 한국 반도체의 장기적 성장을 위해선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기업)나 소부장 기업에 대한 지원이 더 강화돼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정부 차원의 지원책은 대규모 시설 투자에 집중돼 있어 제조 설비가 따로 없는 팹리스는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 시장에서 메모리 반도체 1위, 파운드리(위탁 생산) 2위지만 팹리스 점유율은 1%에 불과하다.

국내 팹리스 기업 네메시스의 왕성호 대표는 “중국에선 팹리스 사업을 한다고 하면 사무실, 전기료 지원에 더해 인건비 보조금 등 지원이 풍부하다고 들었다”며 “이 같은 지원 덕에 2014년 수백개였던 중국 팹리스가 현재 3800개로 대폭 늘었다”고 했다. 국내 팹리스는 150곳 남짓이다. 그나마도 올 상반기에 여러 업체가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중국 업체에 매각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팹리스 업계에선 정부 주도의 투자 활성화와 융자 확대, 인재 양성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국팹리스산업협회 관계자는 “수천억 규모의 팹리스 전용 투자 펀드를 조성하고, 탄탄한 기술을 갖춘 기업은 기술·신용보증기금의 융자 규모도 대폭 늘릴 필요가 있다”며 “보통 전년 재무제표 기준으로 보증 한도를 정하는데, 팹리스는 제품 개발에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장 안정적인 매출이 나지 않아 자금 활용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이서규 한국팹리스산업협회장은 “팹리스 기반이 잘 갖춰져 있어야, 이들의 설계를 바탕으로 생산하는 파운드리가 더 잘된다”며 “세계 1위 파운드리 대만 TSMC가 성장한 것도 팹리스와 시제품 제작 단계부터 긴밀하게 협업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회장은 “국가 주도로 시스템 반도체 전문 인력을 키우는 교육기관을 만들어 연간 500명 이상씩 인력을 배출해야 선순환 구조가 가능하다”고도 했다.

지금 같은 구조라면 인공지능(AI) 붐을 타고 세계 팹리스 기업 최초로 시가총액 1조달러를 돌파한 엔비디아 같은 기업은 한국에서 나올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미국, 유럽 등이 반도체 설비 투자 보조금을 지급하는 건 그들의 제조 기반이 약하기 때문”이라며 “한국은 제조 인프라가 안정적인 만큼 팹리스, 소부장에 대한 지원과 인재 양성으로 반도체 생태계 전체를 키우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