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나 칸 신임 미 연방거래위원장이 지난 2017년 29세 때 예일대 로스쿨 재학 시절 '아마존 반독점의 역설' 논문을 발표해 파란을 일으켰을 때의 모습. /뉴욕타임스

2021년 3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에 32세의 여성을 임명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파키스탄계 이민자로 예일대 법학 박사 출신인 그의 이름은 리나 칸(Lina M. Khan), 별명은 ‘아마존 저승사자’입니다.

2017년 예일대 로스쿨 3학년이던 칸은 ‘예일 법률 저널’에 ‘아마존의 반독점 패러독스’라는 논문을 게재합니다. 이 글에서 칸은 “소비자 가격을 낮추는 데 중점을 둔 현재의 미국 반독점법 체계는 아마존과 같은 플랫폼 기반 비즈니스 모델의 반경쟁적 효과를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전통적인 반독점 및 경쟁 정책 원칙을 복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시장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수익을 포기하는 전략은 아마존의 독점화를 가속하기 때문에 소비자 피해가 없어도 사전에 규제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이 논문은 미국 법조계와 산업계에 커다란 파장을 낳았고, 뉴욕타임스는 “수십 년간의 독점법을 재구성했다”고 했고, 뉴욕매거진은 “반독점 선봉대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칸이 FTC 위원장이 되자 빅테크 업계는 일제히 긴장했습니다. 백악관이 브레이크 없는 성장을 거듭해온 빅테크에 제동을 걸겠다는 명백한 신호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마존과 메타(당시 페이스북)는 FTC에 “회사를 조사하게 되면 칸을 배제해달라”는 청원서까지 냅니다. 자사에 대한 편견을 가진 칸이 공정하지 않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이 청원은 거부됐습니다. 그 후로 2년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칸은 끊임없이 빅테크를 향해 칼날을 빼들었습니다. 문제는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저승사자라더니, 사실은 조자룡 헌 칼 쓰듯 마구 규제를 휘두르다 연이어 망신을 당하는 상황인 거죠. 지난 13일에는 하원 법사위원회에 불려가 3시간 넘게 의원들에게 질타를 당해야 했습니다. 칸의 전쟁은 이대로 끝나는 걸까요.

◇”빅테크와의 소송, 패배로 가고 있다”

리나 칸 연방거래위원장. /연합뉴스

칸은 FTC 위원장이 된 직후 “FTC는 지나치게 현실에 안주했고, 항상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기업을 상대로 더 많은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칸이 세운 전략의 핵심은 빅테크가 더 커지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이크로소프트의 700억 달러 규모 액티비전 블리자드 인수 건이었습니다. 테크 업계 역사상 최대의 거래로 불리는 이 사안에 대해 FTC는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미국 캘리포니아 연방법원은 11일 이를 기각했습니다. “MS의 블리자드 인수가 콘솔, 구독 서비스, 클라우드 게임 시장에서 경쟁을 감소시킬 가능성이 있는지 확실치 않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습니다. 칸은 즉시 항고하겠다고 했지만, 업계에서는 FTC의 승리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봅니다. 워싱턴포스트는 “FTC가 테크 업계와 싸우기 위해 광범위한 접근 방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승리로 향하는 막다른 길에 직면했다”고 했습니다. 악시오스는 “MS의 블리자드 인수는 FTC의 힘을 보여줄 가장 큰 리트머스(시험대)였다”면서 “빅테크를 겨냥한 각종 소송이 FTC의 패배로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FTC는 지난 5월에도 페이스북 모기업 메타가 가상현실(VR) 업체 ‘위딘’을 인수하는 것이 시장 경쟁 저하 행위라며 소송을 냈지만, 법원에서 기각됐습니다. 심지어 칸 위원장이 빅테크 독점을 종식하겠다며 야심하게 추진했던 ‘빅테크 반독점 패키지 법안(플랫폼 독점 종식 법안)’은 올해 초 의회에서 폐기됐습니다. 칸의 뜻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잇따른 망신에도 다음 타깃은 ‘오픈AI’

샘 올트먼 오픈AI 대표. /연합뉴스

13일 미 하원 청문회에서 칸은 그야말로 망신을 당했습니다. 공화당 의원들은 칸이 비즈니스를 괴롭히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또 반독점 소송에서 연달아 패한 것을 두고 “정부 자원을 낭비했다”고 했습니다. 칸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제약, 반도체, 국방, 에너지 등 여러 시장에서 합병에 대한 FTC의 과제가 있다면서 “패소할 것이 확실한 소송은 제기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청문회에 대해 “3시간에 걸쳐 의원들이 칸을 조롱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테크 업계에서는 칸이 뚜렷한 목표를 향해 걸림돌은 상관치 않고 계속 두드리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승패와 상관없이 빅테크의 사업에 계속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칸은 소송에서 질 때마다 “디지털 시대에 맞게 반독점법을 업데이트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 반독점법은 거대 통신업체나 자동차 산업 같은 제조·서비스업에 특화돼 발전해 왔습니다. 빅테크는 과거와 다른 사업 모델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만큼, 반독점이라는 정의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칸의 생각입니다.

잇따른 패소와 법안 도입 무산에도 칸은 다음 타깃도 정해놓은 상태입니다. FTC는 칸이 의회에 불려간 날 전 세계에 생성형 인공지능(AI) 열풍을 몰고 온 챗GPT 개발사 오픈AI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FTC는 “챗GPT가 허위정보를 생성해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는지 여부를 조사하겠다”면서 “불공정하거나 기만적으로 개인정보 보호 및 데이터 보안 관행에 관여했는지도 살펴보겠다”고 했습니다. 빅테크로 막 발돋움하려는 오픈AI를 초장부터 길들이겠다는 의도입니다.

◇오픈AI 조사는 다른 결론 맺을 수도

/그래픽=박상훈

오픈AI에 대한 FTC의 조사는 기존 빅테크와는 다른 결론을 맺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난달 미국 상원에서는 AI가 통신품위법 230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법안이 발의됐습니다. 인터넷 사용자가 올린 콘텐츠에 대해 인터넷 사업자에 면책권을 주는 통신품위법 230조는 구글·메타·트위터 같은 이른바 ‘실리콘밸리 빅테크’를 만들어낸 원동력입니다. 실제로 페이스북·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나 구글 유튜브는 넘쳐나는 혐오·비방 콘텐츠에도 아무런 법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빅테크들이 알고리즘으로 이런 콘텐츠를 확산하고 돋보이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지만, 강력한 면책특권의 보호를 받는 것이죠. 실제로 테러 희생자들이 소셜미디어들을 대상으로 제기한 소송에서도 모두 빅테크가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AI는 다르다는 것이 미 정치권의 생각입니다. 생성형 AI가 만들어낸 가짜뉴스가 미칠 수 있는 파장을 감안할 때 기업의 책임을 처음부터 명백히 규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오픈AI에 대한 FTC의 조사 역시 AI에 대한 규제 여론과 정책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와 별개로 칸의 빅테크 대응 전략도 수정이 필요합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FTC의 빅테크 소송이 한 번도 승소하지 못하면, 앞으로 기업들은 FTC 의견을 무시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크고 화려한 기념비적 승리도 중요하지만, 하나씩 차근차근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칸이 과연 모르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