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현국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미국의 강력한 수출 통제 정책에도 불구하고, 중국 반도체 기업이 자체 기술로 핵심 장비 개발에 성공했다. 미국은 유럽연합(EU)과 함께 구형 반도체까지 제재 범위를 확대하기로 했다.

지난 3일(현지 시각)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중국 국영 반도체 기업 상하이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SMEE)는 연말까지 100% 중국 기술로 개발한 28나노(nm·1나노는 10억분의 1m) 심자외선(DUV) 노광 장비 ‘SSA/800-10′을 고객 기업에 인도할 계획이다. 노광 장비는 반도체 원재료인 웨이퍼에 미세한 회로를 새겨 넣는 데 쓰는 핵심 장비이다. 28나노는 2011년부터 본격 상용화된 반도체 제조 기술로 구형 기술에 해당하지만, 자동차·무기·5G(5세대 이동통신)·사물인터넷용 반도체 제작에 여전히 널리 사용되고 있다. 미국이 최첨단 반도체 장비 수입을 막자, 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은 “미국이 EU와 손잡고 중국의 구형 반도체와 관련한 새로운 규제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구형 반도체는 전체 반도체 시장의 75%를 차지하기 때문에 중국이 점유율을 늘릴수록 미국과 유럽 입장에서 중국 의존도가 높아지는 위험이 뒤따른다. 특히 네덜란드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대중 제재에 미온적이었던 유럽 국가들도 이번 제재에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구형 반도체가 주로 사용되는 자동차 분야가 유럽의 핵심 산업이기 때문이다.

그래픽=김현국

◇'28나노’ 보릿고개 사수하려는 중국

미국은 지난해 10월부터 18나노 공정 이하 D램, 14나노 이하 시스템반도체 생산 장비·기술에 대한 중국 수출을 통제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의 수출 규제를 받지 않는 28나노대 구형 반도체 장비로 눈을 돌렸다. 올 3월에는 중국 정부가 ‘상한(cap)’이 없는 반도체 보조금을 SMEE 등 반도체 장비 기업과 자국 파운드리(위탁 생산) 기업에 제공하는 정책을 준비 중이라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지난 4월에는 상하이 시정부가 반도체·AI 산업 육성을 위해 1000억위안(약 18조원) 규모의 산업 투자 기금을 마련하겠다고 공약을 걸기도 했다.

기업들도 28나노대 반도체 생산량 확대에 매진하고 있다. 중국 반도체 파운드리 1위인 SMIC는 베이징·선전·상하이·톈진 4곳에 28나노 및 그 이전 공정의 제품을 생산하는 신규 생산 라인 구축에 돌입했다. 인력과 자원을 28나노대에 쏟아붓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에선 실제 중국산 28나노 장비가 양산되면 반도체 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선 생산 시설을 확충하고도 장비를 구하지 못한 파운드리 업체 SMIC가 라인을 가동할 수 있게 된다. 중국 자동차 기업들과 IT 기기 업체들은 SMIC에 주문을 넣어 외국산 반도체를 대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또 28나노 노하우가 쌓이면 자연스럽게 첨단 반도체 장비 개발도 시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구형 반도체 기술까지 싹 자르려는 미국

변수는 미국의 추가 제재 수준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미래 기술과 직결된 10나노 이하 첨단 공정뿐 아니라 현재 산업계에서 파급력이 큰 40나노 이하 구형 기술에서도 큰 위협이 되는 중국의 싹을 자르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2026년까지 중국에서 만들어지는 8인치(200㎜)·12인치(300㎜) 웨이퍼 공장은 26곳으로, 미국의 16곳을 앞설 전망이다. 시장조사 업체 IBS는 2025년 전 세계 구형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의 점유율이 40%대까지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블룸버그는 “미국과 EU는 과거 중국 기업이 정부 지원금과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태양광 산업에서 자신들을 몰아낸 것처럼 중국이 장악한 구형 반도체 시장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까 봐 걱정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