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8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서 열린 '플래시 메모리 서밋(Flash Memory Summit·FMS) 2023'에서 321단 1테라비트(Tb) TLC(Triple Level Cell) 4D 낸드플래시 개발 경과를 발표하고 개발 단계의 샘플을 전시했다고 9일 밝혔다. 사진은 SK하이닉스 321단 4D 낸드./SK하이닉스

SK하이닉스와 미국 엔비디아를 비롯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앞다퉈 혁신적 신기술과 제품을 공개하고 있다. 미·중 반도체 전쟁으로 촉발된 글로벌 공급망 위기와 지난해부터 이어진 극심한 반도체 불황 속에서 향후 인공지능(AI)이 주도할 반도체 시장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것이다.

SK하이닉스는 8일(현지 시각)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개막한 ‘플래시 메모리 서밋’에서 321단 ‘세계 최고층’ 낸드 플래시 메모리 샘플을 공개했다. 230단에 그쳤던 낸드 플래시 적층 기술을 단번에 300단 이상으로 끌어올린 제품이다. 경쟁사인 삼성전자가 작년 11월 공개한 최신 낸드 제품이 236단, 미국 마이크론 제품은 232단 수준이다. 더 높은 고층 아파트가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것처럼, 낸드 플래시 시장에선 적층이 기술 경쟁의 핵심이다. 낸드 플래시 시장 4위인 SK하이닉스가 이 제품 양산에 경쟁사들보다 먼저 성공할 경우 시장 판도를 흔들 수 있다.

일러스트=박상훈
그래픽=박상훈

◇AI 시장 잡을 반도체 경쟁

삼성전자·마이크론 등 경쟁사들도 AI 시장을 겨냥한 신제품과 신기술로 대응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같은 행사에서 차세대 데이터센터용 SSD(대용량저장장치) 신제품을 포함한 차세대 제품군을 발표했다. 이번에 처음 선보인 데이터센터용 SSD ‘PM9D3a’는 데이터나 파일을 실행하고 생성하는 속도가 2배 이상 빨라진 것이 특징이다. 삼성전자는 챗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AI) 구동에 최적화된 SSD 신제품도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300단 수준의 차세대 낸드 플래시 양산 계획도 대폭 당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마이크론도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HBM은 챗GPT 같은 초거대 AI 구동에 필요한 메모리 반도체다. 마이크론은 지난달 말 “내년 초 회사의 차세대 HBM 3 제품 대량 양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라며 “테스트에선 경쟁사 제품의 성능을 웃도는 결과를 보였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HBM 시장은 SK하이닉스가 50%, 삼성전자가 40%로 양분하고 있고, 마이크론은 10%를 점유한 후발 주자다. HBM의 생산 수량 자체는 전체 메모리 반도체의 1~2%에 그치지만, 가격이 기존 D램 가격의 6~7배에 이르는 고부가가치 제품이다.

AI 학습용 반도체 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한 미국 엔비디아도 이날 로스앤젤레스에서 차세대 AI 칩 ‘그레이스 호퍼(GH) 200′을 내년 2분기 본격 생산한다고 발표했다. 엔비디아 그래픽 반도체(GPU)와 ARM 중앙처리장치(CPU)를 결합한 ‘수퍼칩’으로, 메모리 용량도 대폭 늘렸다. 구동 가능한 AI의 용량은 최대 3.5배로 늘어나고, 연산 속도는 3배 이상 빨라진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불황에도 연구·개발 투자를 아끼지 않은 기업들이 업황 반등을 앞두고 승부수를 던지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선두 기업은 AI가 촉발한 미래 반도체 시장을 영향력 확대 기회로, 추격 기업들은 판도를 뒤집을 기회로 보고 있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AI의 등장과 함께 컴퓨터 성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더 빠르고 효율적인 반도체를 내놓는 기업들의 레이스가 본격화됐다”고 했다. 조대곤 KAIST 경영대학 교수는 “AI의 원리와 개념도 1950년대에 처음 등장했지만, 실용성이 없어 두 차례나 10~20년씩 암흑기를 겪었다”며 “그때마다 기술적 돌파구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 것처럼, 반도체 침체기에 기업들이 벌이는 신기술 경쟁도 반도체 혁신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ARM도 상장 추진

시스템 반도체 설계 기업 영국 ARM도 아마존과 손을 잡으며 AI 반도체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아마존은 ARM의 핵심 투자자 지위를 놓고 협상 중이다. 다음 달 미국 상장이 예정된 ARM에 아마존이 수조원의 투자금을 대고 상당 지분을 보유한 핵심 주주가 되겠다는 것이다. 서버 임대 사업(클라우드)을 하고 있는 아마존은 ARM의 특허와 기술을 활용해 자체 반도체를 설계·제조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WSJ는 “AI 반도체가 급부상한 만큼, ARM의 기술이 AI 반도체에 쓰일 구체적인 계획을 밝힌다면 ARM 시가총액도 급증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