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대법원이 인공지능(AI)이 신제품이나 아이디어의 발명자로 특허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최종 판단했다. 파이낸셜 타임스(FT)에 따르면 영국 대법원은 20일(현지 시각) 판결을 선고하면서 “우리는 ‘발명가’는 자연인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인간만이 발명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개발이나 발명에 참여한 AI는 특허에 대한 권리가 없다고 쐐기를 박은 것이다.

현재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인간만을 저작권자나 특허권자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AI가 예술, 저술뿐만 아니라 신약 개발이나 제품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 이용되면서 AI의 저작권과 특허권 논란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생성형 AI가 내놓은 결과물이 일부 영역에서 인간의 창작·개발 활동을 대체하면서 저작권·특허권의 정의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그래픽=박상훈

◇한국도 “AI 발명가 인정 못 해”

이번 사건은 AI 개발자인 스티븐 테일러가 2018년 영국 특허청에 식품 용기와 점멸 조명에 대한 두 가지 특허를 출원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발명자에 자신의 이름 대신 자신이 개발한 AI ‘다부스’를 기재했다. “나는 이 발명품과 관련된 지식이 없고, 내가 개발한 다부스가 지식을 학습한 뒤 발명품을 스스로 창작했다”는 이유였다.

영국 특허청은 테일러에게 “실존 인물을 발명자로 등재해야 한다”며 수정을 요구했지만 테일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허청은 테일러의 신청을 거부하면서 소송이 시작됐다. 앞서 지난 4월, 미국 대법원도 만장일치로 테일러의 소송을 기각하고 “자연인만 특허를 받을 수 있다”는 하급심 판결을 유지했다. 유럽연합(EU)과 호주 법원도 다부스를 특허권자로 인정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 다부스는 2021년 국내에서도 특허 출원을 했다. 당시 특허청은 발명자를 AI가 아닌 사람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했으나 테일러가 거부했고, 지난해 9월 특허 출원 무효 처분을 내렸다. 테일러는 이에 반발해 지난해 12월 한국에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7월 현행법상 사람만이 발명자로 인정된다는 이유로 테일러 측이 낸 소송을 기각했다. 테일러의 항소로 현재 2심이 진행되고 있다.

한국 특허청은 “특허법상 발명자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현재 입장이지만 세계적으로 관련 논의가 계속되는 상황”이라며 “향후 국가별로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 해당국 특허청과 함께 판결에 대한 대응 방안을 협의할 예정”이라고 했다.

◇AI의 권리 논의 활발해질 것

FT는 “이번 사건은 AI가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고 어떤 보호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핵심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고 했다. 최근 AI가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과 비슷한 능력을 보여주거나 인간을 능가하면서 인간으로 제한된 발명가와 창작자의 권리를 엄격하게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기존 법적 체계가 도전받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 특허청은 다부스의 특허 출원 신청을 거부했지만 대법원 판결 이후 “특허와 지적 재산(IP) 시스템이 AI의 창작물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한 의문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며 “정부는 영국 특허 시스템이 AI 혁신과 AI 사용을 지원할 수 있도록 이 분야의 법률을 계속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일부 국가에서는 AI를 저작권자나 특허권자로 인정하는 문제에 대해서 예전보다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다부스 사건에 대해 독일 특허법원은 “AI 정보를 병기한 발명자 기재”라는 판결을 내렸다. 테일러와 함께 다부스를 특허권자로 인정한 것이다. 호주 법원도 1심에선 다부스가 특허권을 가질 수 있다고 판결했다가 최종심에서 뒤집혔다.

테크업계와 과학계에선 AI의 창작과 개발에 관한 법리적인 해석이나 법 개정 요구가 잇따를 전망이다. AI 신약 개발 시장이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는 AI의 신약 특허권 인정 논의가 시작됐다. 지난해 10월 미국 톨 탈리스 상원의원과 크리스 쿤스 상원의원은 미국 특허청과 저작권청에 AI를 이용한 창작·개발을 장려하기 위해 기존 법률 개정을 검토하는 국가위원회를 만들 것을 촉구했다. 미국 특허청도 이와 관련해 올해 상반기 공개 의견을 수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