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양인성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양분해온 최첨단 메모리 반도체 고대역폭 메모리(HBM) 시장에 미국 마이크론이 본격적으로 참전했다.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3강이 모두 HBM을 미래 반도체 시장의 핵심 승부처로 보고 뛰어든 것이다. 특히 HBM 시장에서 존재감이 없다시피 하던 마이크론이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보다 앞서 차세대 제품 양산 소식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세 업체의 경쟁이 한층 격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마이크론은 26일(현지 시각) “HBM3E 대량생산을 시작했다”면서 “이번 이정표는 마이크론을 업계 선두에 올려놓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뒤늦은 출발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친 것이다.

그래픽=양인성

◇HBM3E 양산 나선 마이크론

HBM은 D램을 수직으로 쌓아올려 일반 D램보다 한꺼번에 더 많은 데이터를 더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반도체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AI 열풍으로 AI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핵심 부품인 HBM 시장도 급성장하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가트너는 글로벌 HBM 시장이 2023년 11억달러(약 1조4600억원)에서 2027년 51억7000만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전망치보다 최대 3~5배 빠르게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이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HBM은 일반 D램보다 영업이익이 월등히 높고, 아직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SK하이닉스가 메모리 반도체 불황에도 지난해 4분기 흑자 전환에 성공한 것도 HBM 판매 호조 덕분”이라고 했다.

마이크론은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따라잡기 위해 HBM 세대를 뛰어넘는 승부수를 던졌다. 현재 시장에서 가장 앞선 제품인 4세대 HBM3를 건너뛰고, 곧바로 5세대 HBM3E 양산에 나선 것이다. HBM 시장에서 더는 밀릴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이크론은 본격적인 HBM3E 생산을 위해 지난해 6월 대만 타이중에 신규 공장을 가동했고,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1위 기업 TSMC와 협업을 통해 약점으로 꼽히던 패키징 공정을 강화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HBM은 전력 소비와 데이터의 원활한 이동이 중요하기 때문에 고차원적인 부품 배치와 후공정이 필요하다”면서 “TSMC와의 협업을 통해 마이크론이 이를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마이크론의 HBM3E는 2분기 출하를 시작하는 엔비디아의 AI 반도체 H200에 장착될 예정이다. H200은 AI 열풍에 힘입어 엔비디아 매출을 견인하고 있는 기존 H100의 판매량을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마이크론은 3월 기존 HBM3E보다 우수한 36GB 12단 HBM3E 샘플도 고객사에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계속해서 신제품을 내놓으며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것이다.

◇기술 선점 앞세운 삼성·SK

삼성전자는 고용량을 앞세운 신제품 개발을 알리며 마이크론의 HBM3E 양산 소식에 맞불을 놓았다. 삼성전자는 이날 업계 최대 용량인 36GB HBM3E 12단 적층 D램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가 작년 8월 세계 최초로 개발했고, 마이크론이 양산하겠다고 밝힌 8단 HBM3E보다 4단을 더 쌓은 고용량 제품이다. 삼성 관계자는 “서버 시스템에 12단을 적용하면 8단을 탑재할 때보다 AI 학습 훈련에서 평균 34% 속도 향상이 가능하다”며 “데이터 처리량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시장에 가장 적합한 제품”이라고 했다. 삼성전자는 HBM 적층을 16단까지 올리면서 칩과 칩 사이 공간을 완전히 없앤 새로운 공정 기술도 개발하고 있다.

현재 HBM 시장 선두인 SK하이닉스도 이르면 내달 HBM3E를 양산해 엔비디아에 공급할 계획이다. 증권가에선 “SK하이닉스는 기존 공정을 통해 이미 16단 제품까지 개발에 성공한 상황이라 마이크론이 SK하이닉스와의 격차를 단기간에 줄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기태 SK하이닉스 HBM 세일즈&마케팅 부사장은 지난 21일 자사 뉴스룸을 통해 “올해 HBM은 이미 완판”됐다며 “시장 선점을 위해 2025년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HBM(고대역폭 메모리)

High Bandwidth Memory의 약자로 고대역폭 메모리를 뜻한다. D램을 여러 개 쌓아 속도를 높이면서 전력 소비를 줄인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이다. 대량의 정보를 한꺼번에 빠르게 처리할 수 있어 인공지능(AI) 반도체의 핵심 요소로 꼽힌다. 일반 D램보다 가격은 2~3배 비싸지만 개당 수익률은 5~10배에 이른다. SK하이닉스가 2013년 처음 개발했고 미국 마이크론이 최근 5세대인 HBM3E 양산에 세계 최초로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