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양진경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10일(현지 시각) “‘인공지능(AI)의 대모’로 불리는 페이페이 리 스탠퍼드대 인간중심 AI 연구소(HAI) 소장이 최근 워싱턴 정가에서 의원, 관료, 정치부 기자들을 만나 대학 AI 연구 자금을 늘려 달라고 설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는 지난해 6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도 대학의 AI 연구자들이 빅테크를 따라잡을 수 있도록 ‘문샷(달 탐사와 같은 도전적 연구) 투자’를 해달라는 내용의 긴급 탄원을 전달했다.

리 소장이 정치권에 지원을 호소하고 있는 이유는 AI 개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빅테크가 대학의 AI 연구 인력을 싹 쓸어가는 인재 ‘블랙홀’이 됐기 때문이다. 빅테크는 막대한 연봉뿐만 아니라 AI 개발에 드는 거대한 컴퓨팅 파워와 데이터를 내세워 학계 연구 인력을 빼가고 있다. 한국 AI 업계의 인재 부족 문제는 더 심각하다. AI 업계 관계자들은 “국내에선 산학(産學) 간 빼앗고 뺏길 사람도 없을 정도로 사람이 부족하다”면서 “이공계의 우수한 인재들이 학계에 남아 AI를 연구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외 인재 유출까지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래픽=양진경

◇AI 박사는 4년간 2000만 달러

미국에선 과거에 대학 연구소가 주도하던 AI 혁신의 주도권이 빅테크로 옮겨지면서 대규모 인력 이동이 시작됐다. 지난해 스탠퍼드대가 내놓은 AI 보고서에 따르면 메타·구글·마이크로소프트(MS) 등 AI에 수십억 달러를 투입한 빅테크들은 2022년 32개의 주요 생성형 AI 모델을 개발한 반면, 학계에선 3개의 주요 모델을 만드는 데 그쳤다.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따르면 AI 박사 학위 소지자의 민간 기업 취업 비율은 2014년 21%에서 2020년 70%로 급증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금전적 보상이다. 대학과 기업이 경쟁이 되지 않는다. AI 스타트업 데이터브릭스의 알리 고드시 최고경영자(CEO)는 WP에 “박사 학위를 소유했거나 수년간 AI 모델 구축 경력을 갖춘 엔지니어는 4년간 2000만달러(약 262억원)까지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빅테크가 AI 개발 경쟁에 나서면서 대학과 기업이 제공하는 연구 환경의 격차가 벌어진 점도 문제로 꼽힌다. 메타는 AI가 방대한 계산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그래픽 반도체(GPU) 35만개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는 반면, 스탠퍼드대 자연어 처리 그룹은 68개의 GPU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격차가 크다. 페이페이 리 소장은 “학계에 연구 인력이 부족해지면, AI가 상업적으로만 개발된다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AI의 발전에만 관심이 있는 기업들이 AI 연구를 주도하면서 AI가 미칠 사회적 영향이나 위험성 등에 대한 연구는 외면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국내 2027년까지 1만3000명 부족

한국 AI 업계는 “미국처럼 업계와 학계가 경쟁할 정도의 인재 풀(pool)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분위기이다. 데이터 분석 미디어 토터스인텔리전스의 ‘글로벌 AI 인덱스’에 따르면, 한국 AI 산업 수준은 62국 중 종합순위 6위였지만 세부 평가 항목에서 인재 부문은 12위로 뒤처져 있다.

업계에서는 지금까지의 인재 부족보다 앞으로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이 지난 7일 발표한 ‘초격차 산업경쟁력 확보를 위한 글로벌 기술 협력 촉진 방안’ 보고서는 향후 5년간(2023년~2027년) 국내 AI 분야에서 인력 1만2800명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고급 인력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초·중급 인력은 3800명 초과 공급되지만, 고급 인력은 1만6600명이나 모자랄 것으로 예상된다. AI 연구에 필수인 빅데이터 분야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 초·중급 인력이 4300명 초과 공급되는 반면, 고급 인력은 2만3900명 부족할 전망이다.

AI 개발 기업의 한 임원은 “의대 선호 현상과 해외 인력 유출이 심각한 데다가 저출산 문제까지 겹쳐 국내에서 고급 AI 연구 인력을 충당하는 것은 힘들다”며 “지금이라도 정부와 기업이 나서서 해외 인재 유치 등 다양한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