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성규

생성형 인공지능(AI) 분야에서 미국 엔비디아의 막대한 영향력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이 글로벌 IT(정보통신) 업계에서 생겨나고 있다. 엔비디아는 AI 모델을 구축하고, AI 서비스를 개발하는 데 필수인 하드웨어(AI 반도체)와 소프트웨어(AI 개발 언어 및 플랫폼) 기술을 모두 장악하고 있다. AI 분야 기업들은 엔비디아가 생산하는 AI 반도체를 사용하고, AI 관련 프로그램을 짤 때 엔비디아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 엔비디아의 해당 분야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80%를 웃돈다. AI 산업이 발전할수록, AI 기업들의 엔비디아 의존도는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엔비디아의 독점적 영향력을 막기 위해 글로벌 투자 큰손들은 물론, 서로 경쟁하기 바빴던 빅테크들까지 반(反) 엔비디아 연합 전선을 구축하는 데 나서고 있다. 엔비디아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대체할 새로운 ‘AI 인프라’ 구축이 이들의 목표다.

그래픽=김성규

◇빅테크 표적 된 엔비디아

25일(현지 시각)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구글과 인텔, 퀄컴, 삼성전자, ARM 등 주요 기술 기업들은 엔비디아의 AI 개발 소프트웨어 ‘쿠다(CUDA)’에 맞서는 신규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AI 개발 소프트웨어’는 AI가 다양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추론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짜는 역할을 한다. 앞서 이 기업들은 지난해 기술 컨소시엄인 ‘UXL(통합 가속 재단·Unified Acceleration Foundation)’을 구성했다. 이를 통해 어떤 하드웨어에서든 작동할 수 있는 ‘오픈 소스’ 형태의 AI 개발 소프트웨어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엔비디아의 ‘쿠다’는 이 회사의 AI 반도체를 대체 불가능하게 만드는 비밀 병기 역할을 해왔다. 엔비디아가 2006년 내놓은 쿠다는 현재 존재하는 모든 AI 개발용 소프트웨어 중 가장 성능이 좋은 것으로 꼽힌다. 전 세계 400만명이 넘는 개발자가 사용하면서 ‘업계 표준’이 되다시피 했다. 쿠다는 사용료가 없지만, 오직 엔비디아의 반도체에서만 구동된다는 큰 제한 사항이 있다. 미국 AMD와 반도체 스타트업 등에서 엔비디아의 AI 반도체 성능을 따라잡은 신제품을 내놔도, 이들 반도체에서 쿠다를 사용할 수 없다. 결국 쿠다에 익숙한 개발자들이 엔비디아 AI 반도체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빅테크 연합군은 쿠다를 대체할 수준의 강력한 AI 개발 소프트웨어를 내놓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특히 다양한 반도체에서 구동할 수 있어 엔비디아 반도체를 쓰지 않아도 AI 개발을 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올 연말까지 기본적인 기술 개발을 끝내겠다는 계획이다. UXL은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MS) 등에 프로젝트 동참도 요청하고 있다. 퀄컴의 비네시 수쿠마 AI·머신러닝 책임자는 “우리는 개발자들에게 엔비디아의 AI 플랫폼에서 벗어날 길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AI 반도체 경쟁도 치열

업계 표준인 쿠다를 대체하는 새로운 AI 개발 플랫폼이 나타날 가능성이 생기면서, AI 반도체 개발 경쟁도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그동안 고성능 반도체 개발만으론 쿠다를 갖춘 엔비디아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지만, 소프트웨어 지배력이 깨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수요가 많은 엔비디아의 AI 반도체 ‘H100′은 공급 물량이 부족해 개당 2만5000달러~4만달러(약 3300만~5300만원)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대체 소프트웨어 개발과 고성능 AI 반도체의 출현으로 엔비디아의 독점 체제가 무너질 경우, AI 반도체 가격은 빠르게 하락할 전망이다.

엔비디아가 장악한 AI 반도체 시장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업체는 많다. 최대 경쟁사인 미국 AMD는 지난해 12월 엔비디아의 H100을 능가하는 강력한 AI 칩 ‘MI300X’를 출시했고, 아마존과 구글 등은 자체 데이터센터용 AI 반도체를 만들고 있다. 생성형 AI 산업의 선두 주자인 오픈AI의 샘 올트먼 최고경영자(CEO)는 최대 7조달러(약 9400조원) 투자를 유치해 자체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투입할 계획이다.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도 엔비디아와 경쟁할 AI 반도체 공급을 위해 1000억달러(약 134조원)의 자금을 준비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일본어로 ‘창조와 생명의 신’을 뜻하는 ‘이자나기’다. 테크 업계 관계자는 “실제로 UXL이 쿠다를 대체할 소프트웨어 개발에 성공하고, 고객을 유치하게 될 경우 엔비디아의 지위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며 “지난 1년 동안 260% 가깝게 폭등한 엔비디아 주가가 단번에 무너질 위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