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한 대형 벤처캐피털(VC)은 올해 들어 1000억원 이상 투자를 단 한 건도 진행하지 못했다. 투자를 받기 위해 찾아오는 스타트업은 많지만, 원천 기술보다는 기존 서비스에 인공지능(AI) 기술을 조금씩 접목하는 업종이 대부분이다. 업체 관계자는 “AI 등 현재 유행하는 몇몇 사업 아이디어로 창업하려는 이는 많지만, 차별화된 기술 없이는 금방 레드 오션(경쟁이 치열한 산업)이 된다”며 “국내에는 거액을 장기 투자할 만한 원천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말했다.

일러스트=김현국

정부·지자체 등의 창업 프로그램이 잇따라 생기면서, 이들의 지원을 받아 창업한 스타트업도 늘고 있다. 지난해 벤처기업협회에 등록된 벤처 기업의 수는 4만81곳으로 전년 대비 14% 늘었다. 하지만 국내 유니콘 기업(10억달러 이상 가치를 평가받은 비상장 스타트업)은 작년에 게임회사 ‘시프트업’ 1곳, 올해 들어선 아직 없다. 국내 스타트업의 외형은 커졌지만, 기본 체력은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나라 스타트업 생태계가 비교적 쉽게 창업할 수 있는 게임·쇼핑몰 등 B2C 위주로 만들어지고, 차별화된 기술을 보유한 딥테크(혁신 기술 기업) 스타트업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판건 미래과학기술지주 대표는 “인공지능과 자율주행 등 신산업이 등장하면서 세계 스타트업 산업도 관련 기술을 보유한 기업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며 “B2C는 제로섬처럼 한 기업이 망해야 다른 기업이 살지만, B2B딥테크는 새로운 시장과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만큼 B2B 중심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키워야 할 시점”이라고 했다.

◇딥테크 부족한 한국 스타트업

최근 한국과 글로벌 스타트업의 상황을 분석해 보면 뚜렷하게 대비되는 점이 있다. 스타트업 전문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CB인사이츠에 따르면, 현재 한국 유니콘 기업 15곳 중 12곳이 컬리·직방·버킷플레이스(오늘의 집)·시프트업 등 쇼핑 플랫폼과 게임 등 B2C 기업이다. 하지만 해외는 다르다. 지난해 기준 세계 유니콘 기업 533곳 가운데 416곳(약 78%)이 B2B 기업이다. 글로벌에서는 일찍부터 B2B를 중심으로 한 스타트업들이 성장세를 이뤄 왔지만 한국은 여전히 B2C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양상환 네이버D2SF 센터장은 “한국은 B2B 시장이 작은 만큼 당장 수익으로 연결되는 B2C로 몰렸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래픽=김현국

국내 스타트업 시장이 지속 성장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B2C 산업에 편중되면서 국내 스타트업 투자도 위축되고 있다. 국내 스타트업 투자 금액은 2021년 15조9371억원을 기록했으나, 이후 감소해 지난해 10조9133억원에 그쳤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 따르면 1000억원 이상 투자도 2021년과 2022년 각각 19건, 23건에서 지난해 8건으로 줄었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조사에 따르면 스타트업 10곳 중 7곳이 최근 벤처캐피털(VC) 등으로부터 투자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래픽=김현국

◇위축된 젊은 층의 기업가 정신

국내 스타트업에서 ‘성공 스토리’가 줄다 보니 젊은 층의 창업 분위기도 예전만 못하다. 서울대 학부생 벤처 투자 학회 ‘스낵(SNAAC)’은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육성하는 액셀러레이팅(AC) 프로그램을 매년 두 차례 한다. 올 상반기 프로그램에 지원한 70여 스타트업 중 학부생 기업은 약 30%에 불과했다. 졸업생·대학원생이 절대 다수였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에는 의대 열풍과 보수가 안정적인 대기업 선호가 뚜렷하다”며 “대학에서 창업 열기는 10여 년 전보다 훨씬 낮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최근 2030세대 10명 중 6명이 스스로 ‘기업가 정신이 낮다’고 답했다는 조사 결과를 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스타트업 자체에 대한 호감도는 최상위권 점수를 냈지만 정작 창업으로 진로를 택하겠다는 의향은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벤처캐피털 퓨처플레이 류중희 대표는 “2~3년 전부터 2030 창업가보다 4050 창업가의 투자 문의가 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4050의 문의가 약 60%를 차지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젊은 층의 창업 심리 위축이 장기적으로 혁신 기업의 부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벤처창업학회 학회장을 지낸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미국에서는 오픈AI 같은 스타트업이 등장해 AI라는 거대한 신산업을 만들면서 혁신이 지속된다”며 “국내에서도 기술 중심의 스타트업이 더 활발히 등장하고, 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딥테크 (Deep Tech)

특정 기술을 깊게 파고든다는 의미로, 단순히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하드웨어·소프트웨어 변화를 이끄는 혁신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