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애플, 메타, 아마존, 구글 로고. /AP 연합뉴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메타(페이스북 모회사)에 대해 유럽 이용자들의 개인 정보 제공을 사실상 강요하고, 이를 활용한 맞춤형 광고 등으로 부당한 이익을 취했다며 잠정적으로 ‘디지털 시장법(DMA)’ 위반 결론을 내렸다. 지난달 24일과 25일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MS)에 대해 연달아 DMA 위반 잠정 결론을 내린 지 일주일 만이다. 구글과 오픈AI에 대해서도 DMA 위반 여부를 조사 중인 것을 감안하면 주요 빅테크 대부분이 EU의 반독점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미국 빅테크에 대한 EU의 강력한 제재의 배경엔 구글·애플·MS 등에 디지털 시장을 점령당한 경험이 있다는 분석이다. 플랫폼·소프트웨어 시장을 빼앗긴 후 유럽은 검색·소셜미디어 등 디지털 인프라를 미국 기업에 의존하게 됐다. 이제 개막한 AI 시대에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데이터 주권을 외국 기업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는 것이다. 국내도 유튜브·구글·MS 등이 막강한 자금력과 기술력을 앞세워 시장 지배력을 확대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대응책은 사실상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성엽 고려대 기술법정책센터장은 “AI를 앞세운 빅테크의 국내 공습은 과거와 다를 것”이라며 “한국 디지털 생태계를 지킬 실효성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스 재무장관을 지낸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지난해 출간된 ‘테크노 봉건주의’에서 미국 빅테크가 유럽에서 봉건제도를 되살렸다는 주장을 폈다. 구글·아마존·메타 등은 플랫폼이라는 ‘땅’을 제공하는 디지털 시대 영주고, 이 위에서 활동하는 개인과 기업은 영주의 엄격한 규칙을 따라야 하는 농노라는 것이다.

유럽 당국의 강력한 빅테크 규제의 배경에는 이 같은 ‘테크노 봉건주의(technofeudalism)’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다. 미국 빅테크가 글로벌 디지털 영토를 모두 점령하는 바람에 이들을 능가하는 대형 테크 회사가 지금까지도 나오지 못했다. 한국은 드물게 검색·메신저 등 중요한 IT 사업에서 네이버·카카오와 같은 자국 기업이 시장을 주도한다. 하지만 수십조, 수백조원의 자금이 투입되는 인공지능(AI) 산업에서 빅테크의 국내 시장 장악은 시간문제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빅테크의 지배력 무너뜨리는 EU

EU 경쟁당국은 거액의 과징금을 통해 지금까지 빅테크가 독차지하던 이익을 강제로 나누고, 규제를 통해 시장에 더 많은 경쟁자들이 나타날 수 있게 하겠다는 계획이다. 지난 3월 정식 시행된 DMA는 이를 위반할 경우 EU 당국이 빅테크 연간 매출의 최대 10%를 과징금으로 물릴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애플·MS·메타가 모두 DMA 최종 위반 결론이 날 경우 최대 100조원(약 730억달러) 규모의 천문학적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러스트=DALL·E3, 이철원
그래픽=이철원
그래픽=이철원

EU의 움직임에 빅테크들은 이례적으로 정책 변경에 나서며 처벌을 피해 보려 했지만, EU 당국은 변경된 정책의 허점까지 끈질기게 문제 삼고 있다. 메타(페이스북 모회사)는 DMA가 시행되기 전인 지난해 11월 유럽에서 월 10유로의 구독료를 내면 정보 수집과 맞춤형 광고가 없는 ‘깨끗한 소셜미디어’를 제공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유럽 당국은 메타의 이 같은 정책을 사실상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대중에게 정보 제공을 강요하는 위법 행위로 판단했다.

MS 역시 끼워팔기가 문제가 된 화상회의 서비스 ‘팀즈’를 분리해서 판매하겠다 했지만, 집행위는 시장 경쟁이 완전 회복하기엔 조치가 미비했다고 판단했다. 전례가 없던 빅테크들의 정책 변경 조치에도 타협하지 않고, 빅테크가 갖춘 시장 지배력을 확실히 무너지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애플 역시 2008년 7월 앱스토어 출시 후 16년 만에 처음으로 유럽에서 애플 기기에 ‘제3자 앱장터’를 설치하고, 애플의 결제 시스템이 아닌 외부 결제를 허용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EU는 애플이 앱개발자에게 앱 내에서 이용자들에게 외부 결제를 사용할 수 있음을 고지하지 못하게 한 점과, 제3자 앱스토어를 사용할 때 또 다른 형태의 수수료를 물게 한 점을 위법 행위로 간주했다.

◇빅테크 규제, 급물살 타나

전문가들은 “빅테크 규제는 미국이 아닌 유럽이 주도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미국 역시 빅테크와의 역사적인 반독점 소송을 이어가고 있지만, 국가 이익으로도 이어지는 자국 빅테크 기업의 이익을 완전히 해체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은 AI시대가 열린 후 미국 일변도의 기술 권력에 불편함을 내비치고 있다. 인터넷 시대의 기술 독점은 시장 이익이 빅테크로 집중되는 불균형을 낳았다면, AI시대의 기술 독점은 일부 미국 기업들만 핵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은 국가 안보 위협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테크 업계에선 유럽의 DMA가 빅테크를 억제하는 ‘시금석’ 역할을 해준 만큼, 일본·인도 등에서도 DMA와 비슷한 규제법들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디지털시장법(DMA)

디지털시장법(Digital Markets Act)은 EU가 플랫폼 기업의 시장 지배력을 억제하기 위해 만든 법이다. 당장 시장점유율이 독점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독점의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될 때 사전에 규제할 수 있다. 지난 3월 시행에 들어갔으며, 위반 때 최대 연간 글로벌 매출의 10%를 과징금으로 부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