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샌프란시스코의 우범지대 ‘텐더로인’ 거리에 노숙자와 마약에 취한 사람들이 몰려 있다. 런던 브리드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오는 11월 시장 선거를 앞두고 표심을 위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상점의 야간 영업을 강제 제한하면서 상인들이 반발하고 있다. /오로라 특파원

지난 2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악명 높은 우범지대 텐더로인. 생필품 상점 ‘하이드 터크 마켓’은 대낮인데도 방범용 하얀 쇠창살을 사방에 치고, 비좁은 출입구 하나만 열어두고 있었다. 가게 옆 대로에는 마약에 취한 듯 널브러져 있는 노숙자 네댓 명이 보였다. 17년째 장사를 한다는 주인 알리 마나(48)씨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이달 27일부터 시(市) 당국은 야간 치안을 위해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영업을 금지하기로 했다. 마나씨는 “치안을 망친 게 누군데, 이제 와서 장사까지 못 하게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당 소속 시장이 마약 소지를 경범죄로 취급하며 형량을 낮춘 일을 거론하면서 육두문자까지 날렸다. 그는 “지금까지 왜 민주당을 지지했는지 모르겠다. 이번엔 무조건 트럼프”라며 주먹까지 쥐었다.

지난 22일 샌프란시스코 텐더로인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알리 마나(48)씨 위로 'USA'라는 장식물이 걸려있다. 가게 계산대 앞에는 시(市)에서 배포한 '텐더로인 영업 시간 규제 파일럿 프로그램'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마나씨는 "이 구역에서 가게 여러개를 운영하는데, 야간 영업 규제에 걸리는 가게는 매출 감소가 심각할 것"이라며 "샌프란시스코는 당장 마약과 범죄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필요하고, 그건 트럼프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오로라 특파원

◇'캐비아 좌파’에 신물 난 실리콘밸리

실리콘밸리의 중심인 샌프란시스코는 1964년 이후 쭉 민주당 인사가 시장직을 맡아온 ‘딥 블루(deep blue·골수 민주당)’의 도시다. 이번 미 대선에도 여전히 민주당이 강세다. 하지만 거리에선 ‘정치적 변화의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생계 불안과 치안 문제가 극에 달하면서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C)’으로 불리는 좌파 정책이 ‘지긋지긋(fed up)’하다는 시민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도시 서민들 사이에서 이런 변화의 흐름이 뚜렷하다. 식당을 운영하는 멕시코 이민자 파우스토 메이씨는 “돈 많은 이들은 와인을 마시며 ‘성 정체성을 인정해야 한다’ ‘범죄자 인권도 중요하다’ 고상한 이야기를 하겠지만, 나는 노숙자들 때문에 음식을 팔기도 어렵다. 내가 잘못된 것이냐”고 말했다. 캘리포니아 공공정책연구소의 설문에 따르면 ‘오늘 하원 선거가 치러질 경우 어느 당에 투표하겠는가’라는 질문에 공화당을 선택한 저소득층(연 수입 4만달러 이하) 유권자 비율은 지난 2월 38%에서 6월 45%로 늘어났다.

캘리포니아는 민주당 내에서도 급진파의 온상으로 여겨진다. 이런 지역의 민심 변화를 민주당 내에서도 일종의 ‘경고 사인’으로 읽고 있다. 한 민주당원은 “당장 캘리포니아에서 민주당이 지지는 않겠지만, 어떤 공약이나 정책을 내놔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픽=백형선

◇'샤이(shy)’하지 않은 트럼프 지지자

서민층에서 시작된 민심의 변화는 조금씩 중산층으로 번지고 있다. 빅테크의 본사가 밀집한 실리콘밸리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고, 리버럴한 고연봉의 빅테크 근무자들은 사회 소수자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높은 세금도 기꺼이 감내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빅테크들이 대규모 해고를 단행하면서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 테슬라 같은 기업들이 본사를 옮기면서 캘리포니아는 세수 감소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올해 재정 적자는 680억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캘리포니아의 대표 복지 정책인 아동에 대한 무상 급식 등이 축소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래픽=백형선

‘캐비아 좌파(부유한 좌파)’들의 이상적(理想的) 정책에 대한 불만도 크다. 이곳에서 상가를 보유 중인 A씨는 “성 중립 화장실을 의무화하는 법안 때문에 건물 배관을 다 고치고 화장실 공사를 했다”며 “공실률도 높은데 스트레스가 크다”고 했다. 또 다른 사업가는 “이곳에선 여성·소수자 임원 비율까지 맞춰야 한다”고 했다.

드러내 놓고 공화당 지지 발언을 못 하던 사회적 분위기도 사실상 없다. 샌프란시스코 인기 관광지인 ‘피어39′ 앞에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빨간 모자를 판매하는 매대가 나타났다. 대표적 부촌인 라파예트시의 24번 고속도로 위 다리에는 보수 단체 ‘콘트라 코스타의 애국자들’이 ‘우리는 지켜야 할 나라가 있다’라는 문구와 함께 트럼프의 대선 슬로건이 인쇄된 성조기를 붙였다. 이 단체의 리사 디스브로씨는 CBS 뉴스에 “미국은 지금 곤경에 처했다. 조용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캘리포니아와 선거

이민자와 유색 인종 비율이 높은 미국 캘리포니아는 전통적으로 민주당 텃밭으로 분류된다. 특히 샌프란시스코는 1964년 이후 공화당 출신 시장이 선출된 적 없고, 2014년 이후로는 시의 선출직 공무원들이 모두 민주당 인사로 채워졌다. 대선에선 조지 H.W. 부시가 당선됐던 1988년 이후 캘리포니아에서 공화당이 승리한 적은 없다. 2020년 대선 때 민주당 바이든이 63.5%, 공화당 트럼프가 34.3% 득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