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하경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분야에서 대만 TSMC의 독주가 심화하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가 각광받으면서 높은 수율과 첨단 패키징(조립) 능력이 검증된 업계 1위 TSMC로 주문이 쏠리고 있기 때문이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TSMC의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3분기 57.9%에서 올해 1분기 61.7%로 상승했다. 2위 삼성전자는 같은 기간 12.4%에서 1분기 11.0%로 하락하면서 1·2위 격차가 더 벌어졌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인텔, 라피더스 등 파운드리 추격자들은 TSMC를 따라잡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첨단 공정(삼성전자)과 최신 장비(인텔)를 TSMC보다 먼저 도입하거나, 공장 완전 자동화(라피더스)로 제품 납품 기한을 대폭 앞당긴다는 계획까지 나왔다. 비싸고 오래 걸리는 TSMC 대신, 싸고 빠른 자신들을 선택해 달라는 메시지를 내는 전략이다.

그래픽=김하경

◇라피더스·인텔 “2나노 이하서 승부”

도요타·키옥시아 등 일본 대기업 8곳이 뭉쳐 만든 라피더스는 로봇과 AI를 이용해 2나노(10억분의 1)미터 공정 반도체 생산 라인의 완전 자동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반도체를 설계·제조하는 전공정부터 패키징(조립)·테스트(검사)하는 후공정까지 모두 자동화하겠다는 구상이다. 현재 반도체 생산에서 전공정의 자동화 수준은 높지만, 후공정은 아직 사람의 개입이 많은 편이다. 닛케이 아시아는 “경쟁사보다 시간을 단축하려는 조치”라고 했다. 이를 통해 납기를 TSMC 등 경쟁사의 3분의 1 수준으로 당기겠다는 목표다. TSMC보다 2년 늦게 2나노 양산에 돌입하는 만큼 AI 반도체 생산 속도로 승부하겠다는 것이다. 라피더스는 내년 시제품 생산, 2027년 양산을 위해 10월까지 공장 건설을 완료하고 12월 EUV(극자외선) 장비를 도입할 예정이다.

세계 파운드리 2위 삼성전자의 전략은 속도와 저전력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AI 반도체 ‘턴키(일괄 생산)’ 서비스를 앞세워 고객사를 공략하고 있다. 반도체 설계부터 메모리, 파운드리, 패키징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만큼, 공급 속도를 높일 수 있다. 또 저전력 기술인 ‘GAA(게이트올어라운드)’ 기술과 패키징 기술로 미세 공정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GAA는 전류가 새는 것을 최소화해 전력 효율과 성능을 높이는 기술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근 AI 붐으로 AI 모델 개발회사나 데이터센터 운영 기업들은 반도체를 적기에 공급받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런 수요를 삼성전자가 파고드는 것”이라고 했다.

인텔은 2나노 이하 공정에 필수적인 네덜란드 ASML의 차세대 노광 장비 ‘하이 NA EUV’를 오리건 공장에 도입한다고 최근 밝혔다. 이로써 인텔이 확보한 하이 NA EUV는 총 2대다. 인텔 외에 이 장비를 팹에 도입한 기업은 아직 없다. 하이 NA EUV는 기존 EUV보다 빛을 모으는 능력을 높여 반도체 회로를 더 정밀하게 새길 수 있다. 최근 실적 부진으로 대규모 구조 조정을 하면서도 기술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기존보다 2배가량 비싼 장비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 인텔은 올해 상반기 파운드리 사업 부문에서만 53억달러 누적 적자를 기록했다. 이번 장비를 2027년 1.4나노 반도체 양산에 본격 활용해 흑자 전환을 이뤄내겠다는 계획이다.

◇AI 거품론에도 TSMC 매출 급증

후발주자들의 거센 도전에도 TSMC의 시장 지배력은 공고하다. TSMC의 AI 반도체 매출 비율은 지난 2분기 52%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절반을 넘겼다. AI 가속기 시장 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한 엔비디아뿐 아니라 파운드리 경쟁자인 인텔마저도 차세대 AI 가속기 가우디3를 TSMC에 위탁하기로 했다.

최근 불거지는 AI 거품론에도 빅테크들이 AI 인프라 투자를 줄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올해 하반기 TSMC 실적은 시장 예상치를 크게 웃돌 전망이다. 대만 경제일보는 12일 “애플·엔비디아·AMD·퀄컴 등 4대 고객사 칩 주문량이 늘어나면서 하반기 매출이 급격히 늘어날 것이며, 연간 매출 성장률은 당초 예상했던 26~29%에서 31~34% 수준으로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지난 2분기 TSMC의 매출은 약 25조5000억원, 순이익은 10조5000억원으로 각각 전년 동기 대비 40.1%, 36.3%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