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백형선

5년 전 일본 정부가 주요 반도체 소재를 한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제한한 이후 파국으로 치달았던 양국 산업계 교류는 지난해 경제 현안이 풀리면서 복원됐다. 지난해 4월 양국이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를 상호 복원한 데 이어 12월 한일 재무장관 회의에서는 100억달러 규모 통화 스와프(교환) 계약을 체결해 경제 협력이 본격적으로 재개됐다. 이를 계기로 한국 스타트업의 일본 진출이 탄력을 받았고, 일본 첨단 기술기업들은 한국에 연구·개발(R&D)센터와 공장을 건설하며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한일 소비자들의 상호 중고물품 서비스도 출시되는 등 양국 거래 장벽이 사라질 날이 멀지 않았다는 전망도 나온다.

그래픽=백형선

◇밀착하는 한일 스타트업

한국의 중고 거래 플랫폼 ‘번개장터’는 월간 활성 이용자가 2200만명에 달하는 일본 최대 온라인 중고 거래 플랫폼 ‘메루카리’와 손잡고 한일 이용자가 중고물품을 서로 거래할 수 있는 서비스를 지난 6월 내놓았다. 번개장터 앱에서 메루카리의 일본 중고물품을, 메루카리 앱으로는 번개장터의 한국 중고물품을 구입하고 배송도 받게 된 것이다. 번개장터 관계자는 “서비스 현지화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두 기업의 상호 협력으로 대폭 줄일 수 있었다”며 “양국 소비자 반응도 뜨거워 패션 위주였던 거래 품목을 취미용품으로 확대하기로 했다”고 했다.

한국의 채용 플랫폼 ‘원티드랩’은 자체 개발한 인공지능(AI) 기반의 채용 매칭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협력 계약을 지난해 말 일본의 인력 매칭 기업 ‘라프라스’, 이력서 작성 서비스 ‘야깃슈’와 체결했다. 일본에 진출해 매출을 공유하거나 고객사 네트워크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원티드랩 관계자는 “라프라스와 협력 6개월 만에 고객사 200여 곳을 추가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며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여서 라프라스에 추가 투자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또 한국의 숙박 스타트업 ‘H2O호스피탈리티’는 일본의 공유 민박 회사 ‘라쿠텐 라이풀 스테이’가 보유한 일본 전역의 숙박 시설을 독점적으로 운영·관리하고 있다. 기업용 AI 업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한일 공동 창업 스타트업 ‘올거나이즈’는 개발 본부는 한국에, 본사는 일본에 있다. 한·미·일 300여 기업을 고객으로 둔 이 회사는 내년 하반기 일본 증시 상장을 목표로 준비 중이다.

◇韓 진출 확대하는 日 첨단기업

디스플레이, 반도체 장비, 수퍼 섬유 등 일본의 첨단 기술 기업들은 한국 투자를 잇따라 확대하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소재 기업 ‘이데미츠 코산’은 지난달 경기도 오산시에 R&D 센터를 열었다. 이 회사의 해외 첫 단독 R&D 법인을 한국에 세운 것이다. 이데미츠 코산 오산 R&D 센터는 OLED 소재에서 배터리와 반도체 소재까지 연구·개발 영역을 확대할 계획이다. 네덜란드의 ASML과 함께 세계 3대 반도체 장비기업으로 꼽히는 도쿄일렉트론은 지난해 2000억원을 투자해 경기도 화성의 R&D 센터를 증축했고, 올해 4월에는 용인시에 반도체 생산 및 연구시설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탄소섬유 글로벌 1위인 일본 도레이그룹도 경북 구미국가산업단지에 2025년까지 총 5000억원을 투입해 생산 시설을 확장한다고 지난 5월 발표했다. 당시 도레이그룹 측은 “한국을 글로벌 주요 판매처이자 수출 거점으로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술산업계에서는 문재인 정부 당시 악화한 한일 갈등의 벽을 양국 기업들이 지난 1년 사이에 이미 허물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예컨대 지난해 5월 양국 정부가 바이오 산업 협력을 약속한 지 1년 만에 일본 최대 제약사 다케다약품공업이 한국의 신약 및 진단 스타트업들과 상호 협력안을 발표한 것처럼 양국 기업 간 시너지를 꾀하는 밀착이 늘어날 것이란 분석이다. 이준엽 성균관대 교수는 “한국은 디스플레이 패널 및 제조 분야, 특히 OLED 분야에서 압도적 기술력을 보유 중이고 일본은 소재 및 부품, 장비 분야에서 강점이 있다”며 “강점과 약점이 뚜렷한 한국과 일본은 중국과의 경쟁에서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해선 상호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산업계 관계자는 “이미 한일 주요 기업들이 반도체·배터리·에너지 등 미래 산업의 글로벌 공급망을 공동 구축하는 데 나서고 있다”며 “양국 기업 간 협력 강화는 상품과 서비스 등 거래 전반에 영향을 주면서 사실상 시장 통합에 가까운 단계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