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7시 30분부터 화상 팀 회의를 위한 사전 화상 회의를 시작했는데 밤 9시 20분에야 협력사와 마지막 화상 회의 마치고 퇴근했어요. 탈진해서 방에 누워있는데 스카이프 벨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것 같더라고요.”
국내 한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에서 일하는 김모(32)씨가 지난 9월 재택근무를 하던 중 경험한 ‘최악의 하루’다. 이날 그가 소화한 화상 회의는 적어도 15건. 작은 사안 하나를 확인받는데도 동료 및 보고 라인에 있는 상사들과 회의가 수차례 계속됐기 때문이다. 김씨는 “방안에 혼자 앉아 별것도 아닌 일로 시도 때도 없이 화상 회의를 하고 퇴근은 늦어지는 일과가 반복되니 진이 빠졌다”며 “재택근무의 모든 게 싫은 건 아니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다”라고 했다.
코로나 팬데믹 10개월, 많은 직장인이 재택근무 문화에 익숙해진 시점이지만 여전히 ‘사무실 근무파’의 세가 굳건하다. 이 중 다수는 “출근을 안 하는 게 더 피곤하다”며 이른바 재택근무발 ‘번아웃(burn-out·극도의 피로)’을 호소하는 사람들이다. 관리자도 별다를 건 없다. 한 세무 법인에서 근무하는 장모(40) 실장은 “직원 한 사람당 담당하는 업체가 50곳 넘고 업체마다 이슈도 다양한데 빠짐없이 관리하고 있는지 관리자로서 제대로 확인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며 “직원들은 ‘쪼아댄다’며 불만이고 나 역시 매일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확인하느라 녹초가 됐다”고 했다.
◇재택근무의 꿈 이뤄졌지만 “어째 더 피곤하고 우울해”
코로나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가 직장인 일상의 일부가 됐지만 더 큰 피로와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직장인이 많다. “도리어 일하는 시간이 더 늘어나 피곤하다”는 게 대표적이다. 실제 미국 클라우드 업체 오러클이 인사(HR) 컨설팅 회사 워크플레이스 인텔리전스와 함께 11국 직장인 1만20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재택근무가 보편화된 뒤 응답자 35%는 “이전보다 매달 40시간 넘게 더 일한다”고 답했다. 25%는 아예 “과로에 시달린다”고 했다. 절반 이상이 재택근무 이후 일하는 시간이 늘어난 셈이다. 업무 시간 증가는 일과 생활이 섞이면서 생기는 재택근무의 대표적 부작용 중 하나다. 한국만 따져도 사정은 비슷하다. 같은 설문에 참여한 한국 직장인(1000여 명)은 재택근무 선호도(40%)가 11국 평균(62%)보다 유난히 더 낮았다. 일본(38%) 다음으로 낮은 수치다.
재택근무 번아웃을 유발하는 또 다른 요인으로는 과(過)소통이 꼽힌다. 사무실에 모여 일할 때보다 소통이 줄고 업무 효율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역설적으로 지나치게 많은 소통을 하고, 그 결과 구성원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는 것이다. 기업 협업 툴 먼데이닷컴의 강다은 팀장은 “재택근무 환경에서 유발되는 생산성 저하나 피로 문제 대부분은 의사소통 부족이 아닌 과도함에서 온다”며 “불필요한 화상 회의나 메신저·이메일 보고가 단적인 예”라고 했다. 관리자들은 평소라면 요구하지 않았을 출퇴근·업무일지·시간별 위치 정보 보고 등을 다양한 수단을 통해 요구하고, 부하 직원도 성실히 일한다는 표시를 내기 위한 과외 업무에 응해야 한다. 서울 한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이모(32)씨는 하루 몇 차례씩 GPS 캡처로 위치를 보고하고 모든 메시지에 즉각 답해야 하는 ‘올웨이즈 온’ 상태를 유지하는 게 스트레스라고 했다. 그는 “출근하면 커피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는데 재택근무는 메신저 답변이 조금만 늦어도 눈치”라며 “배 아파 화장실에 가면서 불안해 노트북을 들고 간 적도 있다”고 했다.
◇분리·투명성·멘털케어…직장인 번아웃 예방하는 3대 키워드
재택근무 번아웃은 코로나 확산 속도에 따라 재택근무와 출퇴근을 오가는 한국보다 재택근무를 지속하는 해외에서 먼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재택근무 번아웃과 우울감 해소를 위해 직원 정신 건강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회사가 늘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아예 근무시간을 줄여주는 회사도 많다. 금융사 피델리티는 월급은 유지하면서 주간 근무시간을 30시간으로 줄이는 프로그램을 시범적으로 도입했고, 홍보 대행사 게번커뮤니케이션은 ‘셀프케어데이’라는 이름의 임시 휴일제를 몇 달째 운영 중이다.
HR 전문가들은 직원의 재택근무 번아웃이나 우울감을 완화하기 위한 최우선 요령으로 ①일과 생활의 경계 ②투명한 업무 분배와 우선순위 ③직원 정신 건강에 대한 관심 강화를 꼽는다. ‘일과 생활의 경계’는 시간과 장소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글로벌 컨설팅 펌 콘페리의 마크 로열 수석 이사는 “출퇴근은 그 나름의 단점도 있지만 업무 의욕을 다지거나 해방감을 주는 역할도 있다”며 “재택근무 역시 집 안 특정 공간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일하는 습관을 직원끼리 공유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투명한 업무 분배는 ‘과소통’을 막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업무 분배를 확실히 공개해둔 뒤엔 상사가 일일이 화상 회의나 메신저로 보고를 강요하기보단 직원들이 일정 시간 안에 알아서 보고하도록 하자는 취지다. 직원 정신 건강에 대한 관심은 관리자 직급의 상사의 전화나 메시지, 회사 차원에서 명상 및 상담 프로그램 도입 등 다양하다. 예컨데 마이크로소프트(MS)는 내년 상반기부터 협업 툴 MS팀즈에 가상 출퇴근 및 명상 기능을 추가하기로 했다. 가상 출퇴근 기능을 통해 재택근무 루틴을 명확히 하고, 정신 건강 프로그램도 제공하겠다는 취지다.
재택근무가 비정기적으로 시행된 국내 대기업도 직원들의 정서적 변화에 주의를 기울인다. 코로나 사태 이후 우울감을 느끼는 직원이 어느 정도인지(롯데그룹), 사내 정신 건강 상담센터를 찾는 직원이 얼마나 늘었는지(SK이노베이션) 등을 파악하고 멘털 케어 복지를 강화하는 식이다. 명상에 주목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국내 명상 스타트업 ‘마보’는 올 10월까지 기업의 직원 복지용 명상 프로그램 수요가 전년 동기 대비 400%나 늘었다고 했다. 현대·기아차, SK텔레콤, 아모레퍼시픽 등 대기업과 병원·공공기업 등 다양한 기업이 마보의 ‘마음 챙김 명상 프로그램’을 찾았다. 명상 하면 떠오르는 종교의 느낌을 최대한 지우고 모바일 앱을 통해 강사와 대화하며 혼자서도 손쉽게 명상을 따라 할 수 있도록 한 게 특징이다. 소규모 그룹 명상도 가능하다. 라인플러스에서 근무하는 권모(31)씨는 “집에서 오래 혼자 지내다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조용히 마음을 다잡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유정은 마보 대표는 “코로나 스트레스나 고립감, 잦은 디지털 기기 연락에 대한 압박감 등을 호소하는 직장인이 늘면서 기업의 명상 수요도 늘었다”며 “명상 프로그램에 참여한 직장인 대부분이 ‘코로나로 인한 스트레스나 불안감이 해소되는 기분’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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