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지난달 “앞으로 모든 보고서를 컴퓨터 파일로 내기로 원칙을 정했다”고 밝혔다. 한국은행엔 후배가 보고서를 종이로 제출하면 선배가 연필로 수정하는 전통이 있는데, 이를 디지털 시대에 맞게 바꿔보겠다는 취지다. 이 뉴스를 처음 접한 이들 중 대다수의 반응은 이렇다. “아직도 ‘종이와 연필’을 쓰고 있었다고요?”

세상이 점점 더 빨리 변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언제, 왜 생겼는지 알지 못한 채 지속하는 일이 적지 않다. 정부 보도자료에서 자주 보이는 △가 대표적이다. 정부 문서에서 △는 마이너스(-)라는 뜻으로 쓰인다. 예를 들어 지난달 27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1분기 GDP(국내총생산) 취지 및 평가’란 자료의 일부를 발췌해 본다. ‘민간소비(전기 대비 %): 1분기 △6.5… 4분기 △1.5.’ 여기서 일반적으로 쓰는 마이너스 기호를 써도 문제가 없다. 감소란 뜻으로 굳이 세모를 쓴다면 아래로 향한 ▽가 더 적합해 보인다. 공무원에게 △를 쓰는 이유를 물으니 “일하기 시작할 때 이미 그래서 잘 모르겠다”고 한다.

부동산 계약 등을 할 때 여러 종이에 걸쳐 찍는 간인(間印) 혹은 계인(契印)은 어떤가. 목적은 서류 위조 방지라고 하지만 블록체인을 통한 전자 계약까지도 어렵지 않은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왜 귀찮게 도장을 찍어야 하는지 그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언론·출판계에서는 요즘도 글의 분량을 이야기할 때 ‘원고지 매수’를 많이 쓴다. 문서 작성 프로그램의 ‘글자 수’를 200자(원고지 한 매당 글자 수)씩 나누어 분량을 계산하는 이들이 많다. 원고지에 글 쓰는 사람이 드문데 그냥 ‘글자 수’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을까.

위에 언급한 사례들은 신경을 좀 긁는 수준일 뿐이지만, 몇몇 묵은 제도는 우리 사회에 너무 큰 비효율을 초래한다. ‘등기’ 제도가 그중 하나다. 부동산 계약 등을 할 때 필요한 등기는 그 정체가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 아는 사람이 드물다. 배는 등기를 해야 하지만, 자동차나 비행기는 등기할 필요가 없는 등 기준도 들쭉날쭉하다. 자동차 등기를 안 했다고 해서 소유권이 헷갈리거나 문제가 되는 일도 없다.

이렇게 취지가 모호한 이런 일들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이민정 연구원과 연세대 행정학과 이삼열 교수는 지난 3월 ‘국가연구개발사업에서 종이 영수증은 왜 폐지되지 않는가?’란 논문을 냈다. 연구비를 정산할 때 대학뿐 아니라 많은 기업 등에선 여전히 종이로 된 영수증을 요구한다. 신용카드 영수증은 카드사 홈페이지 등에서 전부 전자 형태로 받을 수 있는데도 굳이 영수증을 종이에 풀칠해서 제출하는 건 시간 낭비다. 영수증 잘못 챙겨 재발급 받느라 허비하는 시간까지 더하면 더욱 그렇다.

논문은 종이 영수증과 관련한 여러 사례를 분석하고 나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한 기관이 제도를 바꾸려고 해도 종이 영수증 제출을 요구하는 다른 기관이 한 군데라도 있으면 종이 영수증은 사라질 수 없다. 제도가 적용되는 대상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한번 도입된 제도를 바꾸는 것은 매우 힘들다.’ 제도나 규제를 도입하기 전에 일단 한번 만들면 이를 없애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얘기다.

WeeklyBIZ MINT를 이메일로 보내드립니다.

Newsletter 구독하기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776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