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 조직 문화의 뿌리엔 ‘공포와 압박(fear and pressure)’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조직에선 관리자가 직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게 주된 역할입니다.”

세계적 경영 컨설턴트 마르틴 린드스트롬(51·Martin Lindstrøm)이 한국 기업의 조직 문화를 두고 내린 분석이다. 린드스트롬은 멋진 파워포인트(PPT)와 듣기 좋은 말로 최고 경영진을 홀리는 여느 컨설턴트와 조금 다르다. 최고 경영진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 대신, 조직의 맹점을 파고들어 “제발 상식(common sense)에 따라 생각하라”고 쓴소리를 날린다. 그가 억센 덴마크 액센트로 전하는 ‘불편한 진실’에 세계적인 기업들이 귀를 기울였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맥도널드와 코카콜라, 그리고 해운 기업 머스크 등이 그의 대표적 고객이다. 그는 2009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도 뽑힌 바 있다.

린드스트롬은 Mint 인터뷰에서도 한국 기업에 대한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공포와 압박만으로 젊은 세대가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을까요. 직원들의 두뇌가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히면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없어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상식이죠. 거리낌 없이 질문을 던지고, (도전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저질러도 처벌받거나 망신당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어야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한국 기업이 지금까지 이뤄낸 성과는 눈부십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싹튼 이런 ‘비상식적 요소’를 찾아서 도려내야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린드스트롬이 평소 강연이나 인터뷰에서 쉴 새 없이 강조하는 ‘비상식’은 특별하지 않다. 사내 정치(office politics), 쓸데없는 규칙, 공감 능력 결여, 잘못된 인사와 성과평가 방식 등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일터의 걸림돌이다. 린드스트롬은 “이런 요소들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주요 기업이 잘못된 선택을 내리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강조했다.

◇사내 정치가 상식을 파괴한다

문제 해결의 첫걸음은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린드스트롬은 “그러나 상당수 기업 임원들은 고객을 불쾌하게 하는 문제가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기업 임직원들이 고객보다 덜 똑똑해서가 아니다. 임직원들이 고객이 아닌 상사와 팀장, 임원 등을 의식한 비상식적인 대응, 이른바 ‘사내 정치'를 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왜 사내 정치가 비상식적인 결과를 부르나.

“직원들이 고객 불편에 공감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사내 경쟁자를 의식해) 각자 바쁜 척 하는 데만 몰두하죠. 호텔 등에서 괴물처럼 생긴 TV 리모콘을 본 적 있나요. 전원 버튼이 2개씩 달렸고 무슨 우주선 계기판처럼 버튼이 잔뜩 달린 리모콘 말이에요. TV 제조사 내의 여러 사업부가 리모콘의 형태와 기능을 놓고 옥신각신하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제품이 등장하는 겁니다. 사내 정치란 게 대단한 게 아니에요. 그 주인공 역시 드라마·영화에 등장하는 악랄한 비즈니스맨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만나는 (사내 정치 속) 직원들은 대부분 열정적이고, 선한 경우도 많아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한군데 모아두면 국회 정치판처럼 변하죠.”

—경영진은 이런 문제를 모르는 것일까, 외면하는 것일까.

“갈수록 많은 경영진이 자신만의 시각과 세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기업 경영진을 만나다 보면 상당수가 ‘우린 괜찮아’라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직원들도 이런 경영진에게 직언하기가 절대 쉽지 않죠. 또한 각자 부서의 일만 신경 쓰다 보니 고객이 한 사업부가 아닌 회사 전체를 상대로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조차 잊고 일합니다. 이런 문제의 대부분이 조금만 신경 쓰고 바꾸면 해결되는 것이란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설문조사를 하고, 컨설팅을 받지 않나.

“아무리 비싼 돈을 주고 설문조사와 컨설팅을 해도 상식이 결여되면 무용지물이에요. 스칸디나비아항공(SAS)의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몇 년 전 이 회사 비즈니스 클래스를 탔을 때 기내식으로 과자 한 봉지를 받은 적이 있어요. ‘왜 밥을 주지 않느냐’고 묻자 ‘승객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기내식을 없애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어안이 벙벙했어요. (항공사의) 비용 절감을 염두에 두고 ’500달러를 절약하겠는가, 기내식을 택하겠느냐' 식으로 물어보니 그런 결과가 나왔겠죠. 비행기를 오래 타면 배고플 승객의 사정 따위는 생각도 않고요.”

린드스트롬이 ‘고장난 회사’들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문제점은 쓸데없는 규칙들이다. “비상식적 규칙과 관행이 모여 직원의 의욕을 꺾고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회사를 자주 봤다”는 것이다. 그에게 “어떤 황당한 규칙이 있나”고 묻자, 웃음을 짓더니 이메일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불과 어제도 정말 웃기는 메일을 한 통 받았어요. 한 소프트웨어 회사 영업 사원이 보내준 사연입니다. 그의 이름은 로렌조(Lorenzo)였어요. 이 회사는 직원의 이름 앞글자에 몇 가지 문자를 컴퓨터가 임의로 조합해 이메일 주소를 만들어 주는데, 어쩌다 보니 그의 이메일 주소가 ‘찐따(Loser)’가 됐어요. 믿어지나요. 더 황당한 건 회사에선 ‘그게 이메일을 정하는 룰’이라며 바꿔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영업 사원이 어떻게 그런 이메일로 영업할 수 있겠어요. 이런 사례가 하나 둘이 아닙니다.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애플, 디즈니 등 대기업에도 참 황당한 규칙이 많아요.”

이런 일은 고객 상대로도 벌어진다. 종종 언급되는 것이 국내 한 대형 호텔의 와인잔 대여비다. 프론트에 와인잔을 빌려달라고 요청하면 ‘배달비’로 5000원을 받는다. “직접 가지러 가겠다”고 해도 요지부동으로 5000원을 내게 한다. 해외 유명 호텔서도 보기 어려운 관행이라 부정적 후기들이 인터넷에 올라온다. ‘상식에 어긋나는 규칙과 관행으로 고객의 발길을 되돌리게 하는’ 행위다.

마르틴 린드스트롬은 2000년 컨설팅 기업 ‘린드스트롬 컴퍼니’를 창업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기업들의 비상식적 경영이 초래한 실패 사례를 분석, ‘고장난 회사들’이라는 책도 펴냈다. /린드스트롬 컴퍼니

◇이메일 참조로 책임 회피…“전체 답장 없애라”

—비상식적 규칙과 관행은 왜 고치기 어려운 것일까.

“누군가 마음먹지 않으면 바꾸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도 바꿀 생각을 안 해요. 얼마 전에 만났던 한 대기업 준법 감시 담당자는 아직도 팩스를 쓰더군요. ‘왜 팩스를 쓰느냐. 혹시 고객이 팩스를 써서 그러느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그렇지 않다. 내가 신경 쓸 바도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대다수 직장인의 모습이죠. (이런 문제에) 상식이 아닌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하면 황당한 대응책이 나와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는 몇 년 전까지 고객센터 번호를 웹사이트 어딘가에 꼭꼭 숨겼어요. 고객 항의가 너무 많아 내놓은 궁여지책이었죠. 몇 년이 흐른 뒤에야 사내 한 팀이 ‘고객 문의가 너무 많으니, 이를 유형별로 정리해 일괄적으로 처리하자’는 상식적인 해법을 내놨죠.”

—이런 것들이 기업 경영에 얼마나 큰 걸림돌인가.

“이메일의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많은 직장인이 자신과 별 상관이 없는 데도 수많은 참조(cc) 이메일을 받습니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몸부림이죠. 제가 상담하던 한 기업의 직원은 하루 평균 800통의 이메일을 받았어요. 직원 모두가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려고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참조에 끼워 넣는 거예요. 이 이메일 한 통을 보는 데 1분만 써도 하루에 13시간이 필요해요. 그만큼 시간 낭비가 심하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저는 그 회사 이메일 앱에서 ‘전체 답장(reply all)’ 버튼을 없애라고 조언했습니다.”

—직원들은 결국 평가 기준, 즉 KPI(Key Performance Indicator·핵심성과지표)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KPI는 단순할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너무 세분화해서 목표를 세우면 직원들은 자연스레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만 골몰하게 되죠. 예전에 만났던 앨런 멀럴리 전 포드 최고경영자(CEO)는 KPI를 단순하게 만들었다고 해요. 개인 성과를 0~2점, 회사 실적을 0~2점씩 주고 이 두 숫자를 더한 것에 얼마나 협력을 잘했는지를 0~2점으로 매겨 곱했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최대 8점을 받을 수 있죠.”

출처 = 마르틴 린드르트롬, 업계

◇“코로나로 소통 줄며 문제 더 심해져”

린드스트롬은 기업의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상식팀’을 만들라고 조언한다. 모두가 자신의 일에 몰두해 상식을 생각하지 못할 때 이름을 뭐라고 붙이든 회사에 비상식적인 관행을 고치는 공식적인 부서를 만들라는 것이다.

—실제로 상식팀을 운영한 사례가 있나.

“영국의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이 몇 년 전 상식팀을 운영, 6개월 만에 12가지 문제를 해결했어요. 이 회사 상식팀의 첫 과제는 몇 주마다 바뀌는 복잡한 출장 계획서 규정이었죠. 사측이 이를 바로잡으려 4년을 애썼지만, 워낙 많은 부서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실패했어요. 그러다 상식팀이 앞장서서 이 관행을 뜯어고쳤죠. 또 다른 사례는 해운회사 머스크였어요. 고객센터 직원들이 접수된 불만과 문제를 툭하면 ‘불가항력’(force majeure)으로 분류하곤 했죠.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말을 돌려 한 겁니다. 이유는 간단했어요. 고객센터의 KPI가 해결 시간이었기 때문이었죠. 빨리빨리 처리하려 모든 문제를 자연재해 등의 이유로 돌린 것이죠. 결국 상식 전담 부서가 KPI를 고객 문제 ‘해결’에 두도록 바꿨습니다. 핵심은 경영진이 상식팀에 힘을 실어주고,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보고를 받고, 이 문제를 모든 직원이 공유해야 합니다.”

—상식을 잃어버리는 기업이 많아지고 있다고 보나.

“신종 코로나 사태 이후 직원 간 접촉이 줄고 자연스레 공감 능력도 떨어지면서, 오히려 과거의 문제점이 더 켜켜이 쌓이는 느낌입니다. 또한 이런 문제들이 사소한 이슈로 끝날 수도 있지만, 심각한 결과로 이어질 때도 있어요. 미국 은행인 웰스파고가 대표적입니다. 직원들에게 영업 실적을 늘리라고 압박한 결과, 수백만 개의 가짜 계좌가 만들어지는 사고가 터졌죠. 조직 쇄신이란 게 어려운 일이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많은 걸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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