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지구온난화 주범인 ‘탄소’와의 전쟁에 나서면서 탄소 배출권 거래 시장이 덩달아 급성장하고 있다. 탄소 배출권 거래제는 기업이 정부가 정한 탄소 배출 허용량을 초과해 경영 활동을 할 때에는 비용을 지불하고 탄소 배출권을 시장에서 구매해 쓰도록 한 제도다. 반대로 허용량보다 탄소 배출을 적게 한 기업은 남는 부분만큼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다.
각국 정부는 유엔기후변화협약에서 정한 ‘2050년 탄소 중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탄소 배출량 관리에 고삐를 죄고 있는데, 관련 규제가 강화될수록 허용되는 탄소 배출량이 줄기 때문에 ‘탄소 배출권’을 사고파는 시장은 커질 수밖에 없다. 시장조사 업체 레피니티브에 따르면 작년 글로벌 탄소 배출권 시장 규모는 2377억1800만유로(약 317조원)로 2년 만에 65%나 성장했다. 주요 시장에서 거래되는 탄소 배출권 가격도 올 들어서만 80% 넘게 급등하면서 관련 투자 열기도 달아오르고 있다.
◇전 세계 시장 23개… 가격도 천차만별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에는 23개의 탄소 배출권 선물(先物) 시장(ETS)이 있다. 모든 ETS에서 거래되는 탄소 배출 규모는 글로벌 탄소 배출량(380억톤)의 10분의 1쯤 된다. 지역이나 국가별 상황에 따라 탄소 배출 허용량과 규제 대상 산업군, 탄소 감축 의지 등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ETS는 제각기 운영되고 있다. 구리, 철광석 같은 원자재도 거래되는 시장에 따라 가격이 조금씩 다르지만, 탄소 배출권 가격은 원자재 시장과 비교해도 ETS별로 가격 격차가 매우 큰 편이다. 지난 9월 말 기준 유럽 시장의 탄소 배출권 가격은 톤당 75.72달러로 한국(25.65달러)과 중국(6.52달러), 미국(10.25달러) 등에 비해 훨씬 비싸다. 탄소 배출 허용량을 초과한 유럽 기업이 배출권 구매에 써야 하는 돈이 중국 기업의 11배를 넘는 것이다. 로이터통신은 “유럽은 전 세계에서 친환경 규제가 가장 심한 지역이어서 배출권 구매 수요가 많지만, 중국과 같은 개발도상국은 아직 규제가 느슨해 수요가 많지 않은 편”이라고 전했다. 유엔을 비롯해 국제배출권거래협회(IETA) 등 여러 기관이 통합 ETS 도입 방안을 수년째 연구 중이지만 국가별 입장 차가 커서 진척은 더딘 상황이다.
◇친환경 규제 강한 유로존, 최대 시장
배출권 거래 규모가 가장 큰 시장은 유로존이다. 2005년 세계 최초로 ETS를 출범시킨 유로존의 작년 시장 규모는 2100억유로(약 280조원)로 전체의 88%를 차지하고 있다. 점유율 2위인 미국(11%)의 8배에 달한다. 유로존 ETS 규모가 압도적으로 큰 이유는 유럽이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탄소 배출 규제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 ‘파리 기후 협약’과 올해 ‘글래스고 기후 합의’ 등을 주도한 유럽연합은 최근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55% 감축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친환경 정책 패키지(Fit for 55)까지 발표하며 규제 수위를 꾸준히 높이고 있다. 패키지 내용에 따르면 유럽에서는 2035년부터 내연기관 차량을 일절 판매할 수 없으며, 청정 연료를 쓰지 않는 화물선은 유럽 항구에 들어올 수 없다. 탄소 배출 한도 적용 산업군도 발전, 에너지 등의 기존 영역에 더해 육·해상 운송 및 건축물 분야까지 확대된다.
‘친환경 규제 강화→탄소 배출 허용량 감소→탄소 배출권 수요 증가’라는 도식에 따라 유로존에서의 탄소 배출권 가격은 올해에만 80% 넘게 오르는 등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동부 기준 3%), 한국(28%)의 상승률을 크게 웃돈다. 하지만 유럽연합이 2026년부터 유럽에 수출하는 해외 기업에도 탄소 배출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탄소국경조정세(CBAM)’를 부과할 예정이어서 비(非)유럽권 ETS에서의 탄소 배출권 가격이 앞으로는 더 많이 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신한금융투자 함형도 연구원은 “CBAM은 탄소 배출을 방치해온 국가들도 규제를 시행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 ETF 투자 급증… ”하락 리스크 유의해야”
탄소 배출권 가격이 올해 급등세를 보이면서 주요 시장의 배출권 선물 가격 움직임을 따르는 상장지수펀드(ETF) 투자도 크게 늘고 있다. 작년 7월 미국 뉴욕증시에 상장된 ‘크레인셰어스 글로벌 카본 ETF(KRBN)’가 대표적인데 올해에만 10억600만달러(약 1조1865억원)의 자금이 유입됐다. KRBN은 유럽·미국의 탄소 배출권 선물 가격을 추종하며, 최근 3개월 수익률(21%)이 같은 기간 S&P 500 상승률(2.8%)의 7.5배다. 지난 9월에는 한국에도 유럽·미국의 탄소 배출권 선물 가격을 추종하는 4종의 ETF가 출시됐는데, 최근 한 달간 10~20%대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탄소 배출권은 다른 원자재 선물과 달리 보관 비용이 없어 롤오버(만기가 다가온 보유 선물을 팔고 다음번 선물로 갈아타는 것) 비용이 적다는 장점이 있다.
탄소 배출권 ETF가 각광받고 있지만, 배출권 가격 하락 위험도 적지 않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실제로 지난 10월 EU 집행위가 탄소 배출권 가격이 단기간 너무 많이 오른 것에 대한 실태 조사 가능성을 내비치자 가격이 크게 출렁인 바 있다. 또 기업들이 탄소 저감 장치 투자를 확대하면서 배출권 수요가 줄어들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증권 진종현 연구원은 “단기 수익 목적으로 투자하기보다는 주식, 채권 등과 함께 투자처 다변화 차원에서 자산 일부를 넣어둔다는 생각으로 투자할 것을 권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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